몇 해 전 친정엄마가 싸준 고추절임을 먹다가 운 적이 있다. 고추가 매워 운 것이 아니라 엄마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담근 장을 썼으니 엄마의 맛이 배어 있었다. 그동안 무심했던 그 맛과 냄새를 알아차리고는 갑자기 먹먹해졌다. 늙고 병든 엄마는 더는 간장이며 고추장 같은 걸 만들지 못했다. 이제 이 맛은 내 추억 속에서만 존재할 터였다.
맛있다는 건 무엇일까. 요리사 박찬일은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 속에는 시간이, 사람이 그리고 추억과 그리움이 깃든다. 그림책 는 한 여자아이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에 깃든 이런 다층적 의미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꼬리 무는 상상을 그림으로 형상화이야기는 관찰로 시작한다. 고양이, 선인장, 동생은 무얼 먹을까. 엄마와 아빠는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이렇게 음식을 매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스파게티는 길고, 긴 건 국수다.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 레몬주스는 노랗고, 노란 건 파이와 오빠가 좋아하는 피자 반죽이다. 이 끝 간 데 모르는 의식의 흐름은 뭐지, 하는 순간 부엌 펼침 장면이 나온다. 아하, 그렇다! 아이는 엄마가 음식을 만드는 부엌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음식을 먹으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한 거였다. 그사이 밥 먹다 말고 배가 아파 화장실에 다녀온 오빠는 대뜸 냉장고에 또 먹을 게 뭐가 있나 찾고 있다.
엄마가 만든 새우튀김을 한 입 베어 문 아이는 바싹한 건 맛있다는 걸, 뽀뽀할 때 엄마 냄새도 맛있고 같이 먹으면 더 맛있고, 친구랑 노는 시간이 후딱 갈 만큼 맛있다는 걸 떠올린다. 아빠와 물놀이를 하고 나서 먹는 바나나우유는 꿀맛이다. 뭐가 맛있는지를 떠올리다 ‘맛있다’가 단지 먹는 일을 넘어선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아이는 동생에게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훈수를 둘 만큼 훌쩍 성장한다.
김양미 작가의 글은 마치 시처럼 감각적인 언어로 시작되다 이처럼 점층적으로 ‘먹는다’의 의미를 확장해간다. 또 김효은 작가의 그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흥미롭게 형상화했다. 그림책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다양한 음식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배경을 생략한 라인 드로잉을 보여준다. 굵지만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인 콘테로 먹색 선만 살리고 필요한 만큼만 색을 썼다. 그러다 아이의 생각과 현실을 구분하는 가름선 구실을 하는 장면에 이르면 펼침 장면 가득히 색을 사용한다. 덕분에 독자는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림책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출한 솜씨가 빼어난 책이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오늘 맛있는 걸 먹고, 맛있는 게 뭔지를 생각한 아이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원경으로 노을이 내려앉은 동네 풍경이 보이고 그 가운데 불이 환하게 켜진 아이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있고, 아빠가 저녁으로 떡국을 끓여 내온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장면이다. 훗날 아이가 유년시절의 행복을 떠올릴 때 바로 이날 먹은 떡국이 기억나지 않을까.
설날, 우리 모두 잘 먹겠습니다! 맛있는 건 진짜 맛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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