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카페에 앉아 있다. 심신이 지치고 무표정한 흑백의 얼굴로. 일을 아주 많이 하고 바삐 살았던 그는, 어느 날 출장길 호텔방에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 누구인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몸속에 어떤 사람도 없는 듯한 느낌으로. 덜컥 겁이 난 남자는 트렁크 바닥에서 여권을 찾아보고 그제야 자기 이름이 얀임을 깨달았다. 다음날 찾아간 의사에게서 그는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느리지만 잊고 있던 추억 소환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글을 쓰고 아름답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린 은 영혼을 잃어버린 한 남자를 통해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과 점점 빨라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놓치는 소중한 것을 이야기한다.
국내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오기 전,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을 보고 싶었기에 폴란드어 초판본을 어렵게 구했다. 감격스럽게도 콘세이요가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준 사인본이었다. 폴란드어로 된 책은 어떤 내용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콘세이요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고 추억이고 그리움이었다.
흑백 원경의 그림에 소복이 쌓인 눈밭 위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 눈사람을 만들고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벤치에 앉아 장갑을 나눠 낀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영혼을 잃어버린 남자는 의사 말대로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을 구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 영혼을 기다린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영혼은 남자가 지나갔을지도 모를 길을 어렵고 지친 걸음으로 찾아가고, 남자는 한자리에서 수염이 무성해지고 장발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흑백의 여정은 잊고 지낸 내 유년시절, 아이였던 나와 친구들, 흐릿하게 기억하는 옛날 집을 생각나게 한다. 날씨를 확인하려면 신문을 뒤적여야 했던 시절, 친구에게 보낼 크리스마스카드를 빨간 우체통에 넣던 시절, 느리지만 잊고 있던 추억을 소환시키는 이 이야기는 성인이 되어 마음에 빈 곳 없이 질주하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아리지만 따뜻하게 채워준다.
육체와 영혼이 다시 만나영혼은 한 줄기 빛과 함께 남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고, 어둡고 서늘했던 그림에도 빛과 꽃이, 풀과 온기가 생겨났다. 마치 육체와 영혼이 만나 생명을 찾듯이. 그 둘은 만나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느릿느릿 평온하게.
가끔은 나 역시 ‘영혼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산다. 그때마다 오래된 편지 봉투 안에 켜켜이 들어 있는 옛 사진들 속에서 나를 다시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래도 찾지 못한다면 이 책을 보며 가만히 의자에 앉아, 내 영혼이 다시 찾아와주기를 기다려야겠다.
김은미 그림책 작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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