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지원 옮김, 사계절 펴냄, 1만8천원
한 남자가 카페에 앉아 있다. 심신이 지치고 무표정한 흑백의 얼굴로. 일을 아주 많이 하고 바삐 살았던 그는, 어느 날 출장길 호텔방에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 누구인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몸속에 어떤 사람도 없는 듯한 느낌으로. 덜컥 겁이 난 남자는 트렁크 바닥에서 여권을 찾아보고 그제야 자기 이름이 얀임을 깨달았다. 다음날 찾아간 의사에게서 그는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느리지만 잊고 있던 추억 소환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글을 쓰고 아름답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린 은 영혼을 잃어버린 한 남자를 통해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과 점점 빨라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놓치는 소중한 것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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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오기 전,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을 보고 싶었기에 폴란드어 초판본을 어렵게 구했다. 감격스럽게도 콘세이요가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준 사인본이었다. 폴란드어로 된 책은 어떤 내용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콘세이요의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고 추억이고 그리움이었다.
흑백 원경의 그림에 소복이 쌓인 눈밭 위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 눈사람을 만들고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벤치에 앉아 장갑을 나눠 낀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영혼을 잃어버린 남자는 의사 말대로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을 구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 영혼을 기다린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영혼은 남자가 지나갔을지도 모를 길을 어렵고 지친 걸음으로 찾아가고, 남자는 한자리에서 수염이 무성해지고 장발이 될 때까지 하염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흑백의 여정은 잊고 지낸 내 유년시절, 아이였던 나와 친구들, 흐릿하게 기억하는 옛날 집을 생각나게 한다. 날씨를 확인하려면 신문을 뒤적여야 했던 시절, 친구에게 보낼 크리스마스카드를 빨간 우체통에 넣던 시절, 느리지만 잊고 있던 추억을 소환시키는 이 이야기는 성인이 되어 마음에 빈 곳 없이 질주하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아리지만 따뜻하게 채워준다.
육체와 영혼이 다시 만나영혼은 한 줄기 빛과 함께 남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고, 어둡고 서늘했던 그림에도 빛과 꽃이, 풀과 온기가 생겨났다. 마치 육체와 영혼이 만나 생명을 찾듯이. 그 둘은 만나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느릿느릿 평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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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나 역시 ‘영혼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산다. 그때마다 오래된 편지 봉투 안에 켜켜이 들어 있는 옛 사진들 속에서 나를 다시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래도 찾지 못한다면 이 책을 보며 가만히 의자에 앉아, 내 영혼이 다시 찾아와주기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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