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날씨 때문이었다. 30℃ 넘는 날씨가 여러 날 계속되던 2016년 여름. 아무래도 폭염으로 지친 뇌세포를 활성화해야 할 것 같아 책장을 둘러봤다. 얌전히 꽂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The Coldest Winter). 제목이 딱 마음에 들었다. 한여름이야말로 겨울을 상상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닌가. 그러나 제목만 추울 뿐, 오싹한 스릴러나 판타지처럼 더위를 날려보내는 장르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라는 진지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몇 년 전 한반도 분단과 평화에 대해 글을 쓸 일이 있어 주문해둔 것이었다. 주석까지 합하면 1082쪽에 이르렀는데, 도무지 읽을 자신이 없어 고이 모셔뒀더랬다.
핼버스탬의 ‘저널리즘 스피릿’더위 먹고 고른 책이긴 했지만 펼쳐보니 흥미진진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미군이 평양에 입성한 1950년 10월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엔 총사령관 맥아더는 “인민군은 등 뒤에 한손을 묶고도 무찌를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병사들도 곧 전쟁이 끝날 거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여러 통로로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렸으나, 맥아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맥아더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 등과 공공연히 충돌했음에도, 복잡한 정치 지형 탓에 워싱턴은 맥아더를 적절히 통제할 수 없었다. 군 지휘부와 정책 결정자들의 오판, 군 간부들끼리 암투, 부실한 군 장비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크리스마스 전에 집에 돌아갈 거라 믿고 방한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던 병사들은 ‘백년 만의 추위’ 속에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50년 11월26일~12월13일 벌어진 장진호 전투 묘사는 너무나 참혹하다.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처절한 순간으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 싸우다 죽거나 다친 이는 3600여 명에 이르렀는데 비전투 사상자 수 역시 비슷했다. 이들 대부분은 동상 환자였다. 지은이는 “굶주린 야생동물에게 물어뜯기는 느낌이 들 정도의 강풍이었다”고 묘사한다.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한국인임은 분명하지만, 리더의 지혜가 부족한 나라에선 누구나 ‘콜디스트 윈터’에 희생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보통 사람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싶어서” 일부러 미국 남부의 작은 신문사()에 취직했다고 한다. 막대한 분량의 인터뷰,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생생한 묘사, 풍부한 서사를 직조해내 ‘뉴저널리즘’의 기수로 평가받은 그는 베트남전쟁, 민권운동, 스포츠 등의 주제를 넘나들며 평생 21권의 책을 썼다. 10년 동안 집필한 이 책을 탈고한 지 닷새 뒤에 미식축구 선수들을 취재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고 하니, 마지막까지도 핼버스탬의 ‘저널리즘 스피릿’은 고갈되지 않은 셈이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 여름이 가고침대에서 책을 읽다 잠드는 게 습관인 나는 이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책을 얼굴에 올려놓고 잠드는 실례를 여러 번 범했다. 책갈피는 땀과 나이트크림으로 번들거리기 일쑤였다. ‘벽돌책’에 숨이 막혀 깬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콜디스트 윈터’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쯤 그 길었던 여름도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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