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 “됐어?” 대학 과동기가 카카오톡으로 물었다. 합격자 발표가 났는지도 까맣게 몰랐다. 이틀이나 지났단다. 카페에서 휴대전화로 채용 누리집에 들어갔다. 내 수험번호는 역시 없었다. 일주일 새 세 번째 탈락이다. ‘인턴 서류 통과도 이렇게 힘들다니.’ 앞날이 아득해진다. 카페로 친구들이 들어선다.
5년 만에 처지가 거꾸로여드름으로 뒤덮였던 예슬이의 피부가 말끔해졌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전에 ‘숍’ 다녀왔어.” 예슬이의 일과는 꽉 차 있다. 오전엔 피부관리, 점심엔 모임, 오후엔 인턴.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귀국한 예슬이는 곧바로 미술관 인턴이 됐다. 한 큐레이터가 전담해 일대일로 배운단다. “아빠 친구분이잖아. 오늘 좀 늦게 출근한다고 했어.” 예슬이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벌써 오후 3시가 넘었다.
역시 미국 유학생인 세희는 요즘 한자를 배운다. “유학생은 우리말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잖아.”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 서류전형에서도 가산점을 준다. 세희는 최근 인턴도 거절했다. 꽤 유명한 대기업이었다. 엄마 친구가 주선해줬단다. “난 딱 한 군데에만 올인할 거야.”
입사하고 싶은 곳은 삼성그룹이다. 예슬이와 세희는 지난 겨울방학에 삼성 신입사원 공개채용에 지원해 직무적성검사인 SSAT를 미국 동부에서 봤다. 예슬이가 세희가 공부하는 도시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시험 전날 두 사람은 공항 근처 호텔에 투숙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시험장으로 갔다. 비행기삯·숙박비·택시비로 500달러(약 55만원)를 썼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친구다. 서로 숨길 것도 없다. 남자친구한테 차인 일, 집안의 안 좋은 일까지 다 털어놓는다. 하지만 내가 인턴을, 그것도 서류전형에서만 세 번이나 떨어졌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인턴을 하려면 서류전형·면접을 거쳐야 한다는 것조차 예슬이와 세희는 모를 것이다. 그들에겐 아빠·엄마에게 말하면 뚝 떨어지는 게 인턴이니까 말이다. 인턴 기회란 누군가는 100 대 1의 경쟁을 뚫어서, 누군가는 골라잡듯이 낚아채는 것이다.
5년 전 우리의 처지는 거꾸로였다. 나는 반 1등이라 늘 관심을 받았다. 두 사람은 존재감이 미미했다. 친구들은 내 성적을 부러워했고 난 친구들의 집안 형편을 부러워했다. 우리 집은 공단에서 봉급생활을 하는 아빠가 유일한 경제활동인구다. 네 식구를 아빠가 홀로 책임지니 엄마는 마이너스 통장을 항상 만지작거린다. 집수리라도 하면 엄마가 말했다. “이번달 마이너스 통장이 500만원이야.”
“그 기업은 이미지가 별로잖아”친구들은 방학 때면 해외여행을 가는 넉넉한 형편이었다. 예슬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가족 곁을 떠나는 외로운 생활이 힘들어 1년 만에 돌아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나운서를 꿈꿨지만 학교 성적은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공부가 힘들어지니까 미국을 다시 그리워했다. 예슬이의 아빠가 지나가듯 말했다. “미국에 다시 가는 게 어떠니?” 필이 딱 꽂혔다. 독서실에서 책을 덮고 바로 나왔다. 예슬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해 미국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뒤 명문 사립대에 합격했다. 삼수에 가까운 도전으로 마침내 입학허가서를 받아냈다. 예슬이의 미국 대학 생활은 활기차 보였다. 한인회장도 맡고 방학 때는 아빠 인맥으로 인턴도 한다. 대기업에서, 미술관에서 벌써 두 번째다. 이번 귀국길에는 유럽에 들러 예술 공부 프로그램도 밟았다고 했다.
세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중학교 때 좀 놀다 뒤늦게 공부했지만 내공이 부족했다. 바라던 명문 여대 입학에 실패했다. 재수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미국 대학 편입이 쉽다는 얘기를 듣고 세희 부모가 외동딸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세희는 2년제 미국 대학에 우선 입학했다. 성공적으로 명문 사립대로 갈아탔다. 방학 때 귀국하면 어김없이 부모가 구해준 대기업 인턴 자리가 기다린다. 그마저도 세희는 당차게 거절한다. “그 기업은 이미지가 별로잖아.”
유학, 나의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13살 때부터 내 방엔 세계지도가 붙어 있었다. 5년간 펜팔한 미국 친구의 선물이었다. 두꺼운 앨범을 편지로 채워갈수록 유학의 꿈은 커져만 갔다. 중·고등학교 때는 울면서 해외로 보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말했다. “나중에 네가 돈 벌어서 가라.”
나는 국내 명문대에 입학했다. 오리엔테이션 날, 입학 동기들이 영어로 대화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5년, 중국 상하이에서 3년씩 살다 왔다고 했다. “하와이 어땠어? 내가 말한 거긴 가봤어?” 교환학생을 다녀온 선배들끼리 말했다. 그들의 페이스북은 해외 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득했다. 유학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등학생 때 내게 유학은 ‘꿈’이었지만 대학생 때 유학은 그렇게 ‘필수’가 돼버렸다.
다들 간다는데 나만, 아니 나라고 안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 형편에는 여전히 언감생심이었다. 홑벌이 봉급생활자의 운명이었다. 나는 교환학생으로 갈 방법을 찾아나섰다. 대기업 장학금을 받는 거였다. 친한 과 동기 5명이 모두 교환학생으로 선발됐는데, 그중 장학금을 신청하는 건 나뿐이었다. 다들 신청 자격조건에서 넘친다고 했다. ‘연소득 7천만원 이하, 건강보험료 연 20만원 이하.’ 신청자격이 되는 걸 나는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학과 수업 들으랴, 장학금 신청서 작성하랴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돋보이려고, 반드시 뽑히려고 계획서와 자기소개서를 정성껏 작성했다. 프랑스 릴 가톨릭대학 교환학생으로 체류하는 5개월간을 주 단위로 쪼개 계획했다. 매주 어떤 세미나에 참석하고 어디에서 경험을 쌓을지 꼼꼼히 적었다. 그렇게 며칠을 노트북과 씨름한 결과,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왕복 비행기삯, 등록금, 매달 체재비 등 600만원 남짓을 지원받았다. 그럼에도, 1천만원 가까이 아빠가 추가로 부담해야 했다.
문자 알림에 놀라는 아빠“이번까지만 지원해주는 거야.” 아빠가 반복해서 말했다. 대학 입학 때도 아빠는 그랬다. “졸업 뒤 10년 동안만 등록금 대출이자가 없어. 취업해서 원금은 네가 갚아야 돼.” 이후 나는 ‘등록금 기한 10년’을 마음에 새겨왔다. 5개월간 프랑스에서 머물며 집에 전화를 걸 때 아빠가 농담처럼 내뱉었다. “문자 알림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자다가도 벌떡 깨.” 내가 신용카드를 쓸 때마다 아빠의 휴대전화로 내역이 전송되기 때문이다. 아빠와 함께 웃었지만 가슴이 아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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