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의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 경우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압박해 자백을 받아내는 걸 우리는 문제 삼지 않는다. 자백만 받아내면 그것으로 추가 증거를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백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론해서다. 만일 그 자백이 허위라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게 뒤집힐 것이다. 형사소송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거짓을 기초로 억울한 죄인’을 만들어내는 악마적 절차가 되고 만다. 영국과 미국 학자들이 1930년대부터 허위 자백을 연구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허위 자백은 드물고 그것도 고문·폭행이 원인이라는 고정 관념이 뿌리 깊다. 그 통념이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다양한 연구 사례가 밝혀내고 있다.
허위 자백은 오판으로 이어진다. 125명의 허위 자백 사례를 추적했더니 35%(44명)가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그중 80%(35명)가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고 사형도 9명이나 됐다.통념1 불리하게 허위 자백하지 않는다
이 두잇서베이와 함께 4670명에게 설문조사했더니 79%가 ‘누구도 자신에게 불리한 허위 진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제 유죄 오판 사례를 분석해보면 5명 중 1명은 허위 자백을 했다. 미국에서 DNA 검사로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져 면죄를 받은 303명의 경우 27%가 거짓으로 범죄를 자백했다. 미국 미시간 대학 로스쿨 새뮤얼 그로스 교수가 2012년 6월 오판 사례 873건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그중 15%가 허위 자백 탓이었다. 허위 자백은 오판으로 이어진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 로스쿨 리처드 리오 교수가 30년간 발생한 125명의 허위 자백 사례를 추적했더니 35%(44명)가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그중 80%(35명)가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고 사형도 9명이나 됐다.
통념2 허위 자백은 고문·폭행 탓이다
미국에서 개발한 심리신문기법(리드 기법)이 최근 허위 자백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리드 기법은 피의자에게 압력을 가하되 자백을 하면 무엇을 얻는지 제안하는 ‘최대화·최소화’ 전략이다. 수사관은 피의자에게 가장 심각한 결과와 그보다 덜 심각한 결과를 대조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피의자가 완강히 부인하더라도 ‘어쩌면 결백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수사관은 품지 않는다. 예상했다는 듯이 부인을 차단하고 변명을 받아친다. 그러면 낯선 환경에서 고립감을 느끼던 피의자에게 패배감이 더해져 육체적·정신적 저항이 무너지게 된다. 이때 수사관이 동정적이고 이해하는 태도로 바꿔 자백을 격려한다. ‘내가 했다’고 범행을 시인하면 이제 구체적인 범행 내용을 서술하는 자백 단계로 들어간다. 허위 자백이라면 피의자는 당연히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는 진술을 할 수 없다. 수사관은 유도·반복 신문을 통해 개입하고 진술서에는 피의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가공한다.
통념3 반복질문한다고 허위 자백하지 않는다
백승경씨와 김재휘 중앙대 교수(심리학)가 쓴 논문 ‘반복질문이 허위 자백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반복질문만으로도 사람은 확신이 줄고 질문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대학생 실험자를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 넣었다. 실험자는 모니터에 지나가는 글자를 타이핑하는 인지실험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현재 컴퓨터에 문제가 있어 숫자 키를 누르면 이전 실험 자료가 모두 삭제된다며 강하게 주의를 줬다. 이는 거짓이었다. 타이핑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러 발생을 알리는 메시지가 자동으로 나타났다. 이때 실험자는 참여자가 숫자 키를 누른 것 아니냐고 질문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질문을 세 차례 반복했다. 실험자 50명 중 첫 번째 질문에 42명(84%)이 잘못이 없다고 부인했다. 잘못을 시인한 참가자는 1명(2%)뿐이었다. 나머지(7명)는 모른다고 했다. 동일한 질문을 세 차례 반복하자 잘못을 부정하는 참여자가 33명(66%)으로 줄어든 반면 긍정하는 사람은 12명(24%)으로 늘어났다. 진술을 바꾼 이유를 물어보니 66.7%가 “자꾸 물어보니 정말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6.7%는 “내가 실험을 망친 것 같은 마음에 내가 잘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했다.
통념4 공범이 허위 자백했다고 따라하지 않는다
설문조사에서 71.8%가 ‘허위 자백이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허위 자백하면 그 피의자뿐 아니라 자백에 등장하는 다른 피의자도 잇따라 거짓 자백한다. 이는 특히 미성년자에게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리오 교수가 연구한 허위 자백 사례 125건 중 30%(38건)에서 2명 이상의 피의자가 허위 자백했다. 이유는 첫 허위 자백을 수사관이 다른 피의자들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공범의 자백은 이미 증거로 인정받기에 수사관은 혐의를 부인하면 홀로 중형을 받을 것이라고 회유 내지 협박한다. 자백하면 형량이 주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첫 번째 자백이 가장 어렵지 그다음 공범에게 자백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돼버린다. 그렇게 연쇄적으로 모두 자백하면 판사는 자백을 더욱 신뢰하고 유죄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2008년 ‘수원 노숙소녀 상해치사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통념5 중대 범죄에서 허위 자백은 드물다
리오 교수가 추적한 125건에서 살인사건의 비율은 81%(101건)였다. 그다음으로 성폭행·절도 등이 뒤를 이었다. 국내 최초의 허위 자백 실증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현직 경찰인 이기수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경찰연구관이 2012년 펴낸 ‘형사 절차상 허위 자백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연구’를 보면, 허위 자백 46건 가운데 살인이 28.8%였다. 생명을 침해하는 유기치사, 상해치사 등까지 합
치면 38.4%에 이른다. 그 이유를 그로스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살인 등 중요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수사관에게 다양한 압력이 발생한다. 피해자 유족의 항의에다 언론의 관심도 집중된다. 압력을 받은 수사관은 용의자를 조사하며 강압적인 신문 기법을 사용하고 많은 경우에 장시간 신문한다. 검사도 사회적 관심 탓에 무혐의 처분하는 데 부담을 느껴 약한 증거로도 기소하는 경향이 있다. 법정에서는 끔찍한 죽음을 맞은 피해자를 생각하며 유죄 쪽으로 기우는 결정을 하기 쉽다. 이처럼 살인 등 중요 사건에서 오류의 요인이 더 많이 상존한다.”
마법과 같은 신문 기술로 강하게 부인하는 피의자를 굴복시켜 자백을 받는 게 수사기관의 꿈일지도 모른다. 일본 범죄심리학자 하마다 스미오의 표현대로 “자백은 증거의 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마다는 이렇게 경고했다. “절대적 권위를 업고 난폭한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 있는 것처럼, 왕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험성의 상징이다. 자백은 증거의 왕일 수도 있고 증거의 마왕이 될 수도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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