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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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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나 도로보데스

등록 2012-07-17 17:58 수정 2020-05-03 04:26

“진실을 말해, 단 한 번만이라도.” 권력의 음모로 딸과 아내를 잃은 전직 형사 백홍석(손현주)의 절규다.
는 드라마다. 허구다. 그런데 리얼하다. 기시감이 강력하다. 가령 이런 경우. 대선 당일, 지지율 70%를 오르내리는 독보적 후보 강동윤(김상중)이 치명적 범죄를 자인하는 동영상이 공중파 방송을 탄다. 민심이 요동친다. 강동윤의 보좌관 신혜라(장신영)의 이런 대사.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겠습니다. 컴퓨터 전문가 몇 명 동원해 조작 의혹을 제기하겠습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국민은 혼란에 빠질 테니. 논란과 의혹이 쌓이고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면 국민은 잊을 겁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BBK를 떠올리지 마시길.
이건 또 어떤가. 드라마 속 한국 사회의 실질적 지배자 서 회장(박근형)이 자신의 딸이자 기자인 서지원(고준희)에게 한 수 가르쳐준다. “이 나라 국민들이 동윤이한테 속고 있다고 생각하나? 한오그룹 사위가 서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는데 이 나라 국민들이 그걸 진짜 믿고 있다고 생각하나? 동윤이 공약을 한번 보래이. 집 가지고 있는 놈은 집값 올려준다 카지, 땅 있는 놈은 땅값 올리준다 카제, 월급쟁이한텐 봉급 올려준다 하제? 다 즈그들한테 이익이 되니까 지지하는 기다. 그런데 집값 올려준다고 해서 지지한다고 하면 지가 부끄러운 기라. 그래서 개혁의 기수다 뭐다 해서 지지하는 기다. 국민들은 자기가 자길 속이고 있는 거다.” 2007년 대선 투표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다고 머쓱해하지 마시길. 드라마 아닌가.
SBS 월·화 드라마 엔 이 밖에도 주옥같은 대사와 장면이 많다. 조금 과장하자면, 드라마로 배우는 정치사회학 정도 되겠다. 드라마 속 힘센 사람들은 대개 나쁜 놈들이다. 가물에 콩 나듯 좋은 형사, 좋은 기자, 좋은 검사도 나오긴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모조리 나쁜 놈이다. 표리부동·권모술수의 화신이자 재벌의 마름이다. ‘민나 도로보데스!’(전부 도둑놈들이야!) 강동윤에게 5년 임기 대통령은 정거장일 뿐이다. 최종 목적지는 종신직인 재벌 총수, 바로 서 회장의 자리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탄과 ‘삼성제국’이 생각나시는가.
아무리 리얼해도 드라마는 드라마다. 현실이 아니다. 조심해야 한다. 정치를 악의 소굴로 치부해 등을 돌리는 순간 민주주의는 작동을 멈춘다. 공동체와 개개인의 권리와 의무, 행과 불행이 정치 안에서 주조된다. 그러니 귀찮고 짜증나더라도 감식안을 가다듬어야 한다. 좋은 정치인과 나쁜 정치인을 갈라 칠 수 있는. 생각해보면 어렵지도 않다. 첫째, 말보다 행동, 특히 지나온 삶을 본다. 둘째, 함께하는 사람들을 본다. 때론 측근과 지지자들이 정치인의 민낯을 더 잘 드러내는 법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빼면, 12월 대선의 유력 후보들이 모두 출마를 선언했다. 드라마 속 강동윤이 그렇듯 현실의 정치인들도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저마다 최선의 사회를 약속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사람들도 다 안다. 그래서일까. ‘민나 도로보데스’라며 정치를 냉소하는 이가 참 많다. 반정치주의, 바로 그게 나쁜 정치인들이 바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피곤한 제도다. 최선이 불가능하면 차선을 찾을 수밖에. 그마저도 어려우면 최악을 피하려 애써야 한다. 권리 행사를 포기하면 남는 건 의무뿐. 노예의 길이다. 부자와 힘센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대에게도 한 표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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