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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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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튼튼해지면 민주주의가 진보한다



적극적 정치 참여의 힘에 주목하는 20대·사회단체·진보 진영…
‘깨어 있는 시민’ 강조한 노무현의 꿈은 결실 맺을까
등록 2010-05-20 15:53 수정 2020-05-03 04:26
‘촛불’은 시민이 깨어 있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엄청난 사건이었다. 2004년 3월20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무효를 주장하며 서울 광화문 일대에 모인 촛불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촛불’은 시민이 깨어 있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잠재력을 가진 존재임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엄청난 사건이었다. 2004년 3월20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무효를 주장하며 서울 광화문 일대에 모인 촛불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말년이 되면서 나는 정치적 좌절을 이야기했다. 정치를 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나의 목표는 분명히 좌절이었다. 시민으로 성공하여 만회하고 싶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에 영영 이별을 고하기 사흘 전까지 썼던 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퇴임 8개월 전인 2007년 6월 이미 “임기를 마치면 시민주권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할 생각”이라고 밝힌 그는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 시민’을 강조했다.

울림은 적지 않았다. 그를 지지했든 아니든, 그의 서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든 아니든, 그가 던진 말은 여리게나마 뿌리를 뻗고 있던 ‘시민’이 좀더 튼튼히 자라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20대는 6월 지방선거를 ‘깨어 있는 시민’을 조직해내는 장으로 만들고 있다.

20대가 움직인다

경북 포항의 박주로(26)씨는 한동대 법학과 4학년이다.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기도 벅찰 테지만, 요즘 박씨가 가장 마음을 쓰는 일은 부재자투표 운동이다. 한동대는 재학생 3800여 명 가운데 다른 지역에서 ‘유학’ 온 학생이 80%에 이른다. 박씨도 본가는 충남 예산이다. “2006년 지방선거 자료를 보니 20대 투표율이 40%가 안 되더라고요. 20대가 기성세대를 많이 비판하지만, 사실 자기 목소리를 합법적으로 내는 것조차 안 하는 거잖아요. 주소지가 달라 여기서 투표할 수 없는 친구들한테 조금이라도 정치에 참여할 방법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씨가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자 박씨가 활동하는 국제정치학회와 2년 전 총선 때 부재자투표 운동을 벌인 적이 있는 총학생회가 힘을 보탰다. 한동대엔 전공 구분 없이 교수 한 사람당 학생 30~40명씩 팀을 이뤄 서로를 보살피며 가족처럼 생활하는 ‘팀 제도’가 있는데, 평소 이 팀장들이 모여 학생들의 의사를 학교 쪽에 전달하는 조직인 ‘평의회’도 동참했다. 학교 곳곳에 5월14~18일이 부재자투표 신고 기간임을 알리는 펼침막을 붙이고, 인트라넷에서도 홍보 활동을 벌였다. 박씨는 자신의 개인 블로그 등에 ‘주드LAW통신-투표업레알액션’이란 제목으로 부재자투표 운동을 알렸다. 80여 개 팀이 팀별 모임에서 학생들에게 부재자 신고서를 나눠주는 한편, 학생들의 부재자 신고서를 받아 각자의 주민등록지 시·군·구청에 대신 발송해주는 부스도 두 군데 설치했다.

“친구들이 제일 많이 물어보는 게 ‘부재자투표가 뭐냐’는 거예요.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거죠. 하지만 학생들 탓이라고 할 수만은 없어요. 정부가 제대로 홍보를 안 하는 데도 문제가 있어요. 포항 선관위만 해도 2008년 총선 땐 학교에 붙일 펼침막이라도 지원해줬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없어요. 게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젊은 세대를 투표제도가 못 따라가요. 부재자투표소 설치도 어렵고, 거소투표도 안 되고….”

부재자 신고를 한 한동대 학생이 투표를 하려면 5월27~28일 차로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내까지 나가야 하지만, 신고자가 2천 명이 넘으면 학교에 부재자투표소가 설치된다. 얼마나 신고했을까? 5월14일 현재 1400명. 부재자투표소를 설치할 수 있는 만큼은 아니지만, 2008년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 인원이다.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깨어 있다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인 것 같아요. 시민이 깨어 있지 않다면, 한두 번 정도는 잘못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어도 다시 잘못된 권력이 반복되는 거잖아요. 저도 부재자투표 운동을 하는 게 불편하지만, 스스로 깨어 있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이문환(21)씨는 아예 스스로 서울 송파구의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할 작정이었다. “기업한텐 소비 대상, 정치권엔 정책적 명분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20대, 그러면서도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대학은 ‘취업학교’가 된 현실에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고민이 시작됐어요. 그런데 20대는 이런 상황을 고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죠. ‘낙오하면 안 되겠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만 생각하고 경쟁하는 거예요. 이런 게 바로 정치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이어지는구나 싶었어요.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는 20대의 문제의식을 지닌 당사자가 20대를 대변할 때 생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출마를 막은 건 가족도, 친구도 아닌 공직선거법 16조 3항이었다.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은 만 25살부터 주어지기 때문에, 21살인 이씨는 나설 수 없었다. 선관위에 따지고 주변에 답답함을 호소했지만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다. 이씨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다국적기업 다우(DOW)의 대변인으로 행세하며 가스 누출 사고에 책임을 지고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bbc>에 말해 ‘유쾌한 오보’를 만들어낸 영화 처럼, 기초의원 후보가 현실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가상 예비후보’ 활동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후보 등록 방법부터 사무실 구하기, 펼침막 붙이기, 공약 만들기 등 선거에 나서는 이들이 알아야 하는 전 과정을 스스로 학습하는 한편, 블로그를 통해서도 알리고 있다. 이씨는 “정치 참여는 이렇게 쉬운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또 다음에 다른 20대 후보나 새로 정치를 시작할 사람이 쉽게 이 과정을 밟을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한동대에서 부재자투표 운동을 벌이는 박주로씨(왼쪽)와 ‘가상 예비후보’ 활동을 하는 이문환씨. 이들은 시민단체의 도움을 얻어 시민정치를 체험하고 있다. 청어람 아카데미 제공

한동대에서 부재자투표 운동을 벌이는 박주로씨(왼쪽)와 ‘가상 예비후보’ 활동을 하는 이문환씨. 이들은 시민단체의 도움을 얻어 시민정치를 체험하고 있다. 청어람 아카데미 제공


‘깨어있는 시민’을 길러내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두 사람 뒤엔 이들을 도와주는 ‘청어람 아카데미’가 있다. 기독교 사회단체인 청어람 아카데미는 5년 전부터 시민정치 교육을 하는 ‘정치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아무리 작전 계획이 정교해도 병사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우리가 책을 쓰자는 것은 병사를 키우자는 거예요. 이러면 좀 섬뜩하나? (웃음) 어떤 병사냐면 그 사회의 통념을 지배할 수 있는 수준의 사상과 세력을 갖춰야 하는 것이죠. 진보적 사상과 시민을 육성하지 않고는, 작전 계획만 갖고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동녘 펴냄)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작전’에, ‘깨어 있는 시민’을 ‘병사’에 비유하면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병사를 키울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민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시민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청어람 아카데미는 진작부터 이런 교육을 하는 한편 시민 개개인이 직접 정치 과정에 참여해볼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
진보 진영 전체에서도 지금 최대의 화두는 ‘시민정치’다. 지난해 10월 시민사회와 학계·종교계 주요 인사 113명이 △대안적 전망의 정책 및 메시지 생산 △정치권과 시민사회, 시민사회 내 소통 △민주주의의 균형 회복과 좋은 정치 세력 형성 등에 기여하겠다며 만든 ‘희망과 대안’은 시민의 정치 참여를 주창했다. 같은 시기 진보 소장학자 200여 명이 뭉친 ‘시민정치연구센터’는 △풀뿌리 시민 네트워크의 활성화 방안 △시민적 공화주의에 바탕한 개혁적 정책 대안 등을 만들고 시민 교육에도 힘쓰겠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문제의식은 를 통해 그가 남긴 이야기와 궤를 같이한다. “내가 말하는 시민이라는 것은 자기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 자기와 정치, 자기와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고 적어도 자기의 몫을 주장할 줄 알고 자기 몫을 넘어서 내 이웃과 정치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시민 없이는 민주주의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시민의 숫자가 적다면 시민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거예요. 시민의 범위를 넓혀나가자는 것이 진보주의, 시민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민과 시민정치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힘도 시민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지역주의의 벽을 깨겠다며 민주당 깃발로 부산에 출마해 ‘당연히’ 낙선한 그의 무릎이 꺾이지 않게 한 것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었다. 촛불을 밝힌 것도 ‘깨어 있는 시민’이었다. 2002년 효선·미순양 사망 사건, 2004년 노 전 대통령 탄핵,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때마다 이들이 외친 함성은 “민주주의”였다.
그런데 지금 진보 진영이 새삼 시민정치에 주목하는 것은, 그동안 시민도 시민정치도 견고한 정치 세력으로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엔, 시민이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존재와 깨어남의 징후를 명백히 보여줬지만 진보 진영은 이를 알아채지도 대응하지도 못했다는 반성이 크다. 박씨와 이씨처럼 깨어 있는 시민도 조직되지 않으면 금세 사라질지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9월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 선대위 발대식에서 노사모 회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노사모는 노 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민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9월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 선대위 발대식에서 노사모 회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노사모는 노 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민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1%만 움직여도 역사는 변한다

시민정치는 단순히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찾아내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삶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시민 스스로 정치적 의제로 만들고,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머리를 맞대거나 권력에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진보한다. 시민정치연구센터장인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시민정치와 투표의 근본적인 차이는 ‘나’와 ‘너’가 같은 꿈을 꾼다는 사실을 의식하느냐 아니냐에 있다. 서명운동이나 자원봉사처럼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의 시민정치라도 일단 경험해보면 내가 꿈꾸는 사회적 조건에 누가 찬성하고 반대하느냐를 알게 되고 ‘우리’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정치가 노 전 대통령 바람대로 민주주의의 진보라는 결실을 맺게 될지 전망하는 건 쉽지 않다. 다만 그가 (학고재 펴냄)에 남긴 이 대목을 기억한다면, 희망을 품기가 수월할 것 같다. “대통령을 뽑아놓고 그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항상 결과에 실망하게 됩니다. …만일 정치권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중심이 되는 정치 세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물론 전 국민이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1%의 국민이 확고하게 역사의 발전에 대해 전략적 사고를 하고 있다면 아마 무서운 힘이 될 것입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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