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마지막 눈맞춤을 나눈 뒤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대를 계승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가 후대 앞에 놓여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민주개혁 진영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까?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정치적 고아’라는 표현을 썼다. 정 대표는 8월19일 서울시청 앞 광장 분향소에서 민주당 지도부와 조문을 마친 뒤 “김 전 대통령은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정치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모든 분의 아버지였다”며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 민주당은 이제 고아가 됐다”고 말했다.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불과 석 달 만에 모두 잃은 민주당의 아픔이 배어 있는 비유였다.
2007년 ‘민주개혁 연합론’의 참담한 실패
하지만 대중의 눈물에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민주개혁 진영을 대표해온 두 정치 지도자의 죽음은 민주당과 민주개혁 진영에 풀어야 할 숙제를 남겼다. 민주당은 당장 ‘DJ식 정치모델’에 대한 창조적 해답을 내놓아야 할 처지다.
무엇보다 집권 전략에 대한 논쟁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개혁 진영이 대선에서 이긴 경험은 1997년과 2002년 딱 두 번이었다. 두 차례 대선 모두 민주개혁 진영이 자체 역량만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세 가지 변수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DJP 연합과 보수 진영의 분열, 외환위기 사태였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연합으로 충청권 표심 장악에 성공했다면, 보수 진영에서 이인제 후보가 독자 출마한 사건은 영남표 분열로 이어졌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터진 외환위기 사태도 김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2002년 대선 때도 상황이 비슷했다. 민주당은 우선 국민참여경선으로 흥행몰이에 성공했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할 때는 정몽준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켜 재반전에 성공했다. 정 후보와의 단일화는 부동층이 많던 충청 민심을 노 후보 쪽으로 돌렸다.
김 전 대통령이 주창한 ‘민주개혁 연합론’은 지역적으로는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을 거점으로 충청권을 아우르고 영남의 분열을 꾀하는 전략이었다. 여기에 민주화 세력과 시민사회 세력이 힘을 보태야 비로소 민주 진영이 정권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 김 전 대통령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개혁 연합론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은 2007년 대선이었다. 민주당은 흥행은커녕 이른바 ‘박스 떼기’ 논란만 부르며 정동영 후보를 고집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의 소연합마저도 실패했다. 정동영 후보와 민주당은 보수 진영이 이명박-이회창으로 분열되는 상황에서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연합이 아예 이뤄지지 않았으니 민주개혁 연합론이 실패로 끝났다는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설령 연합이 성사됐다 하더라도 결과가 달라졌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민주개혁 진영이 처한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개혁 연합론이 유효한 수단으로 활용돼왔던 것은 사실이다. 영남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반호남 지역주의’와 언론·사법·행정 등 사회 각 분야를 지배하는 보수 기득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소수파의 연합과 연대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논리다. 이낙연 민주당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호남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면서도 ‘호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정책적으로는 진보 세력을 포용했지만 DJP 연합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정치적 유연함은 현실적 고민을 반영한 결과”라고 말했다.
“연합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
민주개혁 연합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열망은 서거 직전까지 식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 비서실장인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통해 전해진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메시지 역시 민주개혁 진영의 통합이었다. 서거 전 병상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민주개혁 진영 통합에 앞장서야 한다”며 “민주당이 제일 큰 정파니까 과감하게 양보할 건 양보하고 어떻게든 통합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당의 역량이다. 김 전 대통령이 끝까지 강조한 민주개혁 연합론이 과거 DJP 연합이나 2002년 대선 때 이뤄진 노무현-정몽준 연합처럼 일시적 ‘연대’의 형태가 아니라 세력을 아예 합치는 ‘통합’을 의미한다면, 난이도는 한층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현재 민주당의 정치력으로는 민주당 중심의 민주개혁 통합을 주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0년간 민주 정부가 지지층의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과, 민주개혁으로 통칭되는 세력의 넓은 이념적 간극이 통합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2007년 대선 실패에 이어 지금까지 민주개혁 진영이 위축돼 있는 것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 정부 10년을 거치며 신뢰를 잃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종배 시사평론가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주문은 민주당 주도로 민주개혁 진영의 외연을 확대하라는 것인데, 지금의 민주당 틀을 유지한 채 민주당 중심으로 통합을 시도한다면 해법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지부진한 ‘반MB 연합’이 좋은 사례다. 박상훈 대표는 “지난해부터 민주당 중심으로 반MB 연합 논의가 오갔지만 실제로 강력한 반MB 전선이 구축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명박 정부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내놓으면서도 정작 (서민의 실생활과 관련된) 경제 및 노동 정책에 관해 반MB 연합 주도 세력이 현 정부와 어떻게 다른지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민주개혁 통합의 주요 고리인 민주주의의 회복에 대해서는 민주개혁 진영 전체가 쉽게 동의하지만, 민주주의 ‘플러스알파’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며 “쉽게 말해 지금의 민주당은 수도권 개혁 세력의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민주당에 대한 수도권의 낮은 여론조사 지지도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민주개혁 진영이 손대야 할 과제로 통합뿐만 아니라 각 세력의 철학과 가치, 비전과 정책 전반에 대한 재정비를 강조했다. 통합이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나 각 진영의 지지층이 왜소화된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지 않고 통합만 논의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김 소장은 “민주개혁 진영의 지지층이 반MB연대에 기대한 것은 민주주의의 수호 못지 않게 이명박 정부가 구현하지 못하는 가치에 대한 대안이었다”며 “예컨대 대형 마트의 공세에 어려움을 겪는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권 문제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고용 문제에 민주개혁 진영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에 대한 감성적 대응도 일정 부분 필요하지만, 민주개혁 세력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좀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리더십 부재에 대한 지적도 민주당으로서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잇단 서거로 발생한 ‘정치적 구심’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문제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라는 시대적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해온 지도자였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헌신해왔다”며 “반면 지금 민주당에는 두 전직 대통령처럼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논쟁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리더십 부재의 문제는 당장 서거 정국이 지나간 뒤 찾아올 정치적 혼란기, 즉 ‘백가쟁명’의 시대에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야권 주도권을 놓고 경쟁이 과열된다 해도 무게중심을 잡아줄 지도자가 없는 현실이다.
민주당 안팎에서 ‘포스트 DJ’로 꼽히는 인물은 김근태·손학규·유시민 전 의원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정도다. 김근태 전 의원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오랜 기간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왔다는 이력을 바탕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곧잘 비교돼왔다. 고문 후유증과 정치적 실패로 시련을 겪었다는 이력도 비슷하다. 다만 대중 정치인으로서 인기가 다소 낮다는 사실이 약점으로 꼽힌다.
손학규 전 의원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중앙과 지방 행정을 두루 경험한 사실이 강점이다. 2009년 4월29일 재보선에서 인천 부평 국회의원 재선거 승리를 이끌며 만만찮은 수도권 득표력을 보여준 사실도 당분간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지만, 그에게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밖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인기가 크게 오른 한명숙 전 총리는 갈등과 반목의 시대를 어루만질 수 있는 섬세한 어머니 리더십이, 유시민 전 의원은 단단한 고정 지지층이 정치적 자산이다.
반면 정동영 의원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맞섰다는 소중한 경험이 있지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분당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약점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4·29 재보선에서도 그는 민주당 지도부의 뜻을 묵살한 채 전주 덕진에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다. 민주당 실무 당직자는 “주요 정치 지도자라면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게 마련인데, 정동영 의원의 이미지는 분당과 분열”이라고 말했다.
서거 정국 이후 민주당 내 역학구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제기될 민주개혁 연합론에 대한 논쟁과 리더십 문제가 민주당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숙제지만, 이런 시련이 부정적인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 애널리스트는 “단기적으로 민주당을 포함한 민주개혁 진영의 혼란이 예상되지만, 이는 피해갈 성질도 아니고 피해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오히려 민주개혁 진영의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모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갈등을 ‘발전적’으로 승화시켰을 때의 이야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민주당에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셈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박종준 전 경호처장 다시 경찰 출석…김성훈 차장은 세번째 불응
경호처, ‘김건희 라인’ 지휘부로 체포 저지 나설 듯…“사병이냐” 내부 불만
중립인 척 최상목의 ‘여야 합의’…“특검도 수사도 하지 말잔 소리”
김민전에 “잠자는 백골공주” 비판 확산…본회의장서 또 쿨쿨
미 국가안보보좌관 “윤석열 계엄 선포는 충격적이며 잘못됐다”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독감 대유행’ 예년보다 길어질 수도...개학 전후 ‘정점’ 가능성 [건강한겨레]
박종준 전 경호처장 긴급체포 없이 귀가…경찰, 구속영장 검토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