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정치인 김대중’을 만든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재라는 암울한 정치 상황, 민주화 투쟁, 분단 체제…. 그런데 정치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1971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격돌한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해 3월 출간된 (이하 )이다. 이 책은 당시 10만 부가량 인쇄돼 대선 유세 현장을 중심으로 뿌려졌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대중경제론’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전까지 형성·발전·수정돼온 정치인 김대중의 경제철학이다. 특히 대중경제론의 원형인 는 정치인 DJ를 ‘진보적 경제 대안을 가진 야당 정치인’으로 각인시킨 책이나 마찬가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을 지낸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지난 2005년 에 쓴 글에서 “대중경제론은 김대중을 그냥 반대만 하는 야당 정치인이 아니라 현실의 합리적 대안을 가진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국민에게 각인시킨 중요한 자원이었다”고 말했다.
1971년 대선 앞두고 출간돼 인기몰이“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추진을 들여다보니… 재벌에 독점적 이윤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대중이 참여하고 대중이 공동 운영하고 같이 분배받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이, 노동자가 주식을 소유하고, 감사도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사람들이 해서…. 대중경제의 목표는 중산층을 지원하고 하위계층을 중산층화하는 것이다. 당시 내 주장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체제’였다. …당시 대중경제론을 만들면서 박현채 교수와 함께했다.”(김대중, 2008년 7월 가을호 인터뷰에서)
‘대중경제연구소’ 이름으로 나온 이 책은 머리말에서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 지향을 선언하고 있다. 당시 대선 국면에서 발간된 이 책은 ‘대중’이란 단어와 김대중 후보 이름의 발음이 같다는 작명의 행운까지 더해지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돌풍을 몰고 왔다. 사실 는 그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에 나설 당시 ‘정치적 목적’으로 펴낸 것이다.
이 가 고 박현채 조선대 교수의 작품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일화다. 박현채는 ‘민족경제론’을 제창한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당시 박 교수의 주도로 충남 온양온천의 제일여관에 여러 명의 진보적 학자들(정윤형 전 홍익대 교수, 김병태 전 건국대 교수, 김대중의 당시 비서였던 김경광 등)이 모여 10여 일 동안 합숙하며 공동 집필을 했다고 한다. 박 교수가 총괄을 맡고 DJ가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전체적으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DJ와 박 교수는 동향 출신으로, 1960년대부터 이미 서로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71년 당시 DJ는 내외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대중경제론을 만들면서 박현채 교수 등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박현채 교수하고는 같이 좀 했어요. 책 내는 것도 도와줬고. 내외문제연구소 할 때는 남덕우 당시 서강대 교수 같은 분들도 초청해서 얘기를 듣기도 했죠.”(김대중, 2008년 7월 가을호 인터뷰에서)
놀라운 건 정치인 김대중이 대선 당시 공안당국의 감시가 집중된 빨치산 출신 사상범인 박현채 교수한테 대중경제론의 이론적 근거와 체계를 맡겼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이 박현채에게 대중경제론의 집필을 맡겼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김대중은 당시 대통령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만약 김대중과 박현채의 관계를 박정희 정권이 안다면 김대중은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김대중의 경륜과 고뇌와 문제의식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중경제론은 기본적으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류동민 충남대 교수)고 할 수 있다.
수차례 수정 거쳐 민주적 시장경제론으로물론 박현채 교수가 대중경제론을 기획했다지만 실제 집필자를 둘러싼 저작권 문제로 를 접근하는 건 협소한 시각이다. 대중경제론이 태동한 건 이미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6년 1월 박순천 민중당 대표의 연두기조 연설문에 ‘대중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등장하는데, 이 연설문은 DJ가 직접 구상하고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중경제론의 아이디어와 철학은 DJ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산층, 중소기업, 균분’을 강조한 이 연설문이 발표된 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중산층 논쟁이 뜨겁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어 1969년 DJ는 에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정치사적으로 대중경제론은 박정희의 개발독재 노선에 대항하는 진보적 대안이란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정치적 기획가로서 DJ의 탁월한 면모와 정치적 역량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대중경제론의 등장으로 단기적으로 당시 1971년 대선을 야당이 주도할 수 있었다. 대중경제론이 구체화되면서 야당인 신민당이 정책정당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확산되었고 지지자들의 반응도 고조되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해 DJ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도시 지역에서 박정희보다 높은 득표를 하였다. 중·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대중경제론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온 대안적 전망이자 ‘서민과 중산층’ 정당을 표방해온 야당의 존립 근거와 정당성의 기제로서 작동하였다.”(정상호, ‘정책이념으로서 대중경제론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 2008년 제18호)
나아가 박현채 등 당대 진보적 지식인 그룹과의 적극적인 연대 속에서 대중경제론이 형성됐다고 한다면 이른바 ‘비판적 지지론’의 뿌리가 여기까지 닿아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까.
대중경제론은 DJ의 집권 직전까지 몇 차례의 수정과 변형을 거치면서 연속성과 단절을 동시에 보여왔다. 1983∼84년 미국에 건너가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으로 있던 DJ는 장문의 영문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1985년 영문판 (Mass-Participatory Economy)으로 출판됐다. 이 책은 1971년의 를 바탕으로 당시 뉴저지주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던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책은 국내에서 (도서출판 청사·1986)이란 제목으로 간행됐다.
대통령 김대중의 정책은 대중경제론을 배신이 1980년대판 은 “기업가, 노동자, 농민, 소비자 등 모든 집단이 민주정부하에서 경제적 의사결정 과정의 여러 국면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창하고 있다. 그 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중경제론은 다시 이강래 특보가 실무를 맡아 펴낸 이란 수정본으로 재출판되기에 이른다. 국민의 정부 시절 경제 분야 정책을 관통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으로 대중경제론이 수정된 셈이다.
그 뒤 박현채 교수는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 태도를 오랫동안 유지하다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DJ가 이른바 ‘뉴 DJ 플랜’을 표방하자 정치적으로 결별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 교수는 지난 1995년 세상을 떠났다.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대중경제론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대중경제론의 마지막 수정(?)은 김대중 집권 뒤의 실제 경제 운용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체제를 시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김대중은 그 자신이 그렇게도 주장했던 바대로 대중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양극화를 더욱 심화한 장본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1997년 이후의 김대중은 1971년의 대중경제론을 수정 증보한 것이 결코 아니라 철저하게 배신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헌법학자들 “국힘, 사태 오판…한덕수가 재판관 임명 가능”
‘아이유도 간첩 추정’ 집콕 윤석열은 지금…
계엄 거부하고 법무부에 사직서…난 반국가 세력일까 [류혁 특별기고]
나훈아 “용산 어느 쪽이고, 우짜면 좋노”…내란 나흘 뒤 공연서 언급
[단독] 계엄 선포 순간, 국힘 텔레방에서만 ‘본회의장으로’ 외쳤다
1호 헌법연구관 “윤석열 만장일치 탄핵…박근혜보다 사유 중대”
이번엔 권성동의 ‘대통령 놀이’…야당 빼고 국정 주도권 잡기
민주 “김어준의 암살조 주장은 허구” 판단하고도 쉬쉬
“탄핵 정국서 내란죄 수사에 검찰이…악습 반복될 것”
롯데리아 내란회동…선관위 장악할 대북공작 ‘에이스 40명’ 판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