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흘린 마지막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 전 대통령이 생애 마지막으로 쓴 연설문이면서 끝내 연설은 하지 못한 ‘9·19로 돌아가자’라는 제목의 글에 비춰보면, 그 눈물엔 남북관계의 악화에 대한 비감이 절절히 녹아 있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을 하루 앞둔 지난 7월13일 폐렴 증세로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면서 결국엔 ‘유고 연설문’이 된 이 글에서 김 전 대통령은 ‘2005년 9월19일 베이징 6자회담의 공동성명 정신으로 돌아가 북한 핵 문제를 대화로 풀 것’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들에게 촉구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8월14일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이 “9·19 공동성명의 의무를 준수하고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정치적 약속”을 제시하면 대북 제재를 중단할 수 있다는 뜻을 시사했다고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떠났지만 그의 필생의 염원이 담긴 유고문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의 85년 역정은 생사를 넘어 한반도의 평화와 운명적인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김 전 대통령이 1970년대부터 가다듬어온 통일 방안은 그를 국제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분단 한국의 정치사에선 지팡이에 의존한 그의 다리가 상징하듯 평생의 아킬레스건으로 작동했다. 1971년 신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그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보장론’을 주장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용공조작 표적이 된다. 남북연합을 거치는 ‘3단계 통일론’이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안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권의 주홍글씨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레드 콤플렉스는 지역주의 망령과 함께 1970년대 이후 한국 정치를 ‘김대중 대 반김대중’ 구도로 고착화해나갔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1997년까지 한국의 대선은 상대 후보가 누구였든 김대중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로 귀결됐다. 투표용지는 ‘다지선다’였지만 실질적 잣대는 ‘OX’형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목 조르기식의 북한 병합론과 결별하며 수구세력의 ‘우려’대로 경제적 교류 확대를 통한 대북 포용정책을 펼친다. 그 결실로 분단 55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정상이 직접 만나 합의한 6·15 공동선언이 나온다.
그동안 남북한 사이에 평행선을 달리고 있던 통일 방안을 현실적으로 접목한 6·15 선언문의 5개항 중 끄트머리는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 간 대화 개최’와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 합의문을 근거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했다. 자신의 임기 때는 물론이고 퇴임 뒤인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답방 촉구는 지속됐다.
김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답방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김 전 대통령의 문제의식을 해방전후사로 확장해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은 미국과 소련의 세계지배 전략에서 연유했다는 이른바 ‘외인론’이 우세하지만, 내재적으론 단독정부 수립을 꾀한 냉전 세력의 득세에 있었다. 바꿔 말하면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 추진 세력의 좌절이 분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지만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의 극한 대립 속에서 주도권을 잃고 만다. 또 1946년 ‘정읍 발언’을 통해 노골적으로 남한 단독정부 구상을 드러낸 이승만의 움직임에 당황한 김구 등 민족주의 우파 진영은 남북 협상을 주장하지만 때는 늦었다. 백범은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지만 끝내 단정 수립을 막아내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모두 평화의 한 조각분단 세력과의 기나긴 싸움을 뒤집어보려는 김 전 대통령의 심경은 지난 1월15일 서울외신기자클럽 회견의 질의·응답에서 배어난다. “사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15 정상회담에서 나하고 협상할 당시에 제일 오래 시간을 끌고 어려웠던 문제가 남쪽 방문이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에는 ‘당신이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노인들 공경한다고 듣고 있는데,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못 오겠다는 것이 당신이 말한 동양 도덕이고 어른에 대한 대접이냐’고 그렇게까지 얘기했습니다. …상당히 남쪽 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서울 답방을) 이행하라고 독촉하니까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하면 어떠냐고 러시아 측에서 우리한테 물어왔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하다못해 휴전선 바로 이남의 장소에서 만나더라도 남쪽으로 와야지. 나는 평양 갔는데 북쪽은 오지 않고 외국에 가서 만나면 그걸 우리 국민이 납득하겠나? …북한이 제일 주저하는 것은 남쪽에 왔을 때 신변안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한 내에서 반대 세력이 강하니까.”
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통해 남북 합의에 대한 실천 의지를 국내외에 다시 한번 각인시킴으로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수구 냉전세력의 폄훼를 막아내고 남북 화해의 시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6·15를 스쳐 지나가는 역사가 아니라 통일이라는 대장정에 결정적인 이정표로 만들려 했지만 답방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방을 이끌어낼 수 있는 현실적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 중 하나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극적이게도 다시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다. 생전에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을 열고 사후에는 평양에서 서울로 오는 길을 인도하는 ‘조문 답방’, 그에게 삶과 죽음은 모두 평화의 한 조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김 전 대통령은 답방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파탄 지경에 이른 남북관계의 회복이 발등의 불인 상황에서 답방 문제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 정부에 이어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킨 정부가 들어섰다면 그의 서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년이 6·15 공동선언 10주년이 아닌가. 그때 애석하게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더라도 ‘조문 답방’의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더불어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때 불거진 ‘조문 시비’를 역지사지로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정반대의 현실에서 고단한 삶을 접은 김 전 대통령의 눈물은 그래서 서럽다.
마지막 봉사, 마지막 기회북한은 지난 8월19일 김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조전을 보낸 데 이어 21일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포함된 6명의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했다. 김 비서를 단장으로 한 북한 쪽 특사 조문단은 이날 특별기편으로 서해 직항로를 통해 서울에 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 북쪽 당국자의 첫 방남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전에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남긴 김 전 대통령의 공적은 민족과 함께 길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경재 전 의원은 지난 8월19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그동안 두 번이나 (답방) 약속을 어겼는데 이번에 과감하게 조문단을 끌고 남한을 내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빠졌지만 북한의 ‘특사 조문단’은 김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불러온 마지막 봉사다. 이명박 정부가 김 전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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