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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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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확고한 인권 신념 지켜온 사형수 출신 대통령…
국가인권위 발족과 실질적 사형제 폐지 길 닦는 업적 남겨
등록 2009-08-28 15:14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006699">1972~1984 죽음 앞에 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살해 위기를 겪었다.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다 1980년 9월17일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고난 속에서 인권 철학이 뿌리내렸다.</font>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

지난 2005년 2월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을 찾았다. 연세대 리더십센터의 초청으로 한·미·중·일 네 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특별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1천여 명의 학생이 ‘동아시아와 젊은 리더십’이란 주제의 강연을 경청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던 때를 회상했다.

재판장 입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군사정권의 모진 박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과 민주주의 투사’로 만들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군사정권의 모진 박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인권과 민주주의 투사’로 만들었다.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큰소리는 쳤지만, 살고 싶어서 재판장에서 재판관 입을 뚫어지게 쳐다봤어요. 무기징역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기만 받으면 언젠가는 나올 테니까. 왜 재판관 입을 쳐다봤냐 하면, ‘무’ 하면 (재판관) 입이 (앞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사형의 ‘사’ 하면 (재판관) 입이 (옆으로) 찢어집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이것이었죠.”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한없이 절박했을 생사 갈림길에서의 고뇌는 ‘입이 튀어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라는 말과 웃음으로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실제 인생에는 그런 유머로 넘기기에는 너무 엄혹하고 절박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이 언급한 1980년 신군부 군사재판에서의 내란음모 혐의 사형선고를 비롯해, 1971년 목포에서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해 시도, 1973년 일본에서의 납치·수장 위기까지….

하지만 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군사정권의 도 넘은 탄압은 자연스레 그를 인권 수호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인권 탄압 피해의 상징과 인권 수호의 상징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과 인권 향상의 절박한 필요성을 온몸으로 체득하며 인권에 대한 불굴의 신념을 만들어갔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돼 인권과 관련해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사형제 폐지 노력을 들 수 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는 김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자신의 임기 중인 2001년에 출범시켰다. 출범 준비 단계에서 국가인권위의 위상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시민사회단체 쪽과 갈등을 겪긴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는 우리 사회 인권 향상의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18일 김 전 대통령 서거 2시간여 만에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고인이 목숨을 바치며 추구했던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라는 추도문을 냈다.

김 전 대통령과 인권을 잇는 또 다른 축인 사형제와 관련해서는 좀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우선 본인 스스로가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출신이다. 김형태 변호사(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장)는 “1992년 대선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선 주자들을 불러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가 확고하게 사형제는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며 “김 전 대통령 스스로가 사형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빠져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런지, 권력이 사람 목숨을 뺏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사형제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사형제 반대의 주요한 근거로 들었다. 그는 2006년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기고문에서 “보다 우려되는 것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주창자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몰아내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잘못 사용한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혁당의 가담자들이 잘못 기소된 뒤 사형됐고 나조차도 사형 언도를 받고 거의 사형에 처할 뻔했다”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사형제 폐지 활동 나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하지만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신념은 개인의 경험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는 “그분 자신이 해방 뒤부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기에 형벌로서의 사형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며 “1973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사형폐지·고문철폐 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도 (김 전 대통령이) 열심히 참여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앞서 언급한 기고문 서두에서 “사형은 민주주의 기초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한 뒤 “민주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존중하는 것이며, 생명을 끊는 것은 법의 이름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인권의 기본적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사형과 범죄 감소율은 무관한 점 △당사자로 하여금 범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기회를 줄 수 없는 점 등도 반대 이유로 지적했다. 사형제의 여러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이런 신념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 단 한 번도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됐다. 또 이런 정책 기조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어져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은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운동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23명의 사형을 한꺼번에 집행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업적은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의석수 또는 ‘국민 감정’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두 차례 정도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형수·양심수와 관련해서만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진정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제 폐지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본인은 사형제를 폐지하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는 못해 실질적 폐지라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이후 매번 제출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으며, 17대 국회에서도 절반이 넘는 175명의 국회의원이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민적 여론 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누명 썼던 외국인 사형수 본국 돌려보내

인권운동가들은 살인 누명을 쓴 외국인 사형수 2명을 모국으로 돌려보낸 것도 사형제와 관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파키스탄인 모하메드 아지즈와 아미르 사밀은 동료 파키스탄인을 살해한 혐의로 1993년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편지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로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도록 진술을 사주한 또 다른 파키스탄인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하지만 당국은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답변만을 내놓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이들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하면서 국외 추방 형식으로 고국에 돌려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을 뿐 한국인이 개입된 사건이 아닌 만큼 감형 뒤 본국으로 추방해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주장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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