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역 분향소를 직접 찾아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고, 5월29일 영결식에 참석해 크게 오열했다. 민주주의·인권·평화를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하다 급기야 7월13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그를 다시 거리로 불렀는가.
불가에서는 죽음을 시사(時死)와 비시사(非時死)로 나눈다. 시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해 자연스레 죽는 것을 뜻하고, 비시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어떠했는가. 여든다섯 나이의 영면을 창졸지간의 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삶의 궤적에서는 아직 못다 한 일에 대한 한들이 깊이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전까진 건강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지난 5월까지 그는 ‘건강’했다. 월·수·금요일로 세 번씩 있는 투석을 마친 뒤면 각종 수치는 정상에 가까워졌다. 매주 월요일 오후 4시면 박지원 민주당 의원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과 함께 ‘주간 정세분석’을 했다. 정세현 전 장관이 국제 정세와 한반도 주변 정세에 대해, 박지원 의원이 국내 정세에 대해 만든 보고서를 같이 읽고 토론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구두보고를 받지 않고 보고서 내용을 직접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3~4시간을 꼬박 토론했다. 한 달에 두 번꼴로 외부 강연이나 언론 인터뷰를 했다. 모든 원고는 직접 작성했다. 질문지나 강연 청탁서를 보고 사흘 정도 생각을 가다듬은 뒤 비서관에게 구술했다. 타이핑된 원고는 직접 윤문을 하고, 임동원 통일문화재단 이사장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게 보내 의견을 들었다. 돌아온 의견의 내용에 따라 원고를 바꾸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주재했다. 일반인 식사량의 1.5배를 넘는 특유의 대식도 여전했다. 김대중 평화센터 주관의 공부 모임도 두세 달에 한 번씩 이뤄졌다. 한반도 정세와 외교 현안을 다루는 발제부터 토론 종결까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비극의 시작은 5월23일이었다. 독일의 유력지 과의 인터뷰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충격을 받은 그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다. 이때부터 식욕부진이 시작됐다.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그를 보좌하던 한 전직 장관의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이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말씀하신 며칠 후 대통령을 뵈었을 때 ‘대단히 멋있는 표현이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그게 멋지라고 한 말이 아니오’라며 정색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전한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이대로 가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험해서, 내가 늘 우려하던 3대 위기가 터질 것 같아서, 노무현 대통령과 둘이서 손잡고 조만간 전면에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소. 같이 목소리를 내자고 하던 참이었소. 박정희 정권 때의 DJ와 YS처럼 함께 투쟁할 생각이었소. 그런데 그가 돌아가셨소. 그건 진심이었지 멋있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오.”
서울역에 설치된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이명박 정부가 추도사를 못하게 막은 것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도, 장례식에서 3시간이 넘게 자리를 지키다 노 전 대통령의 유가족들을 붙잡고 오열한 것도 그 절절함에서 비롯된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뙤약볕 아래서의 강행군이 결정타였다. 지난 10년간 대통령을 돌봐온 정남식 연세대 교수(심장내과)는 “계속해서 뙤약볕에 오래 계신 것이 무리였다. 그때 우리 의료진들도 굉장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스탠바이’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일 당시 주치의팀에 있었던 한 내과 전문의는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심한 고관절 통증으로 앉아 있기 힘든 상태였는데, 3시간 넘게 불편한 의자에 앉아 계시다 심한 후유증을 얻게 되셨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대통령을 만나온 정세현 전 장관은 “그 이후부터 점차 목소리가 약해지셨다. 나중에는 귀를 가져다 대도 알아듣기 힘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1시간 넘게 인터뷰하고 연설문 직접 구술
그럼에도 일정을 그대로 소화했다. 입원(7월13일)하기 사흘 전인 7월10일에도 영국의 〈BBC〉와 1시간 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7월12일에도 이틀 뒤에 있을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연설문을 직접 구술하고 밤 9시에는 임동원 이사장에게 전화해서 “원고를 봐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왜 이렇게 무리했을까. 조금이라도 고삐를 늦췄으면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세현 전 장관의 말이다.
“9월 미국 방문을 통해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면 사전에 국제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미국 언론을 직접 상대하기 전에, 먼저 유럽을 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BBC〉 같은 영향력 높은 유럽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정부의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국제 여론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연설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5개국 유럽연합 소속 주한대사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의 빌랜트 바그너 기자는 6월호 인터뷰 기사에 이렇게 썼다. “동아시아의 위기 고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걱정스럽게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을 서울의 자택으로 다시 한번 초청했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핵 위협을 심각하게 봐야 한다는 긴급한 호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느낀 의무감은 무거웠다. 김성재 김대중 도서관장도 “7월 초에 저를 부르셔서 ‘남북관계가 이렇게 안 풀리니, 김대중 도서관도 앞으로 이 남북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당부 말씀을 하셨다. ‘건강이 회복되면 우리 함께 열심히 합시다’라고도 하셨다. 굉장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지전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난 4월 목포를 방문했을 당시 “전쟁하면 파멸이다. 유엔군 사령부 추계를 보면, 전쟁 나면 하루에 수도권에서 150만~200만 사상자가 생긴다. 핵무기 안 써도 장사정포와 미사일은 부산까지도 가고 일본도 간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서세(逝世) 이튿날, 빈소인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서 만난 ‘영원한 비서’ 박지원 의원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9월에 있을 미국 방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이를 대비해 면밀한 준비를 하시다 결실을 맺지 못하셨다”고 말을 흐렸다.
5월 초의 중국 방문과 6~7월의 유럽 언론 인터뷰 및 대사들 접촉을 바탕으로 9월에 미국에서 제시할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유고가 된 유럽연합 상공회의소 연설문에 그 단서가 있다. ‘9·19로 돌아가자’는 제목의 원고를 잠시 보자.
“21세기는 세계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세기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시대가 출현한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동안 세계는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였습니다. 세계는 미국과의 친소관계, 이해관계, 종교적 차이 등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친소와 원근에 상관없이 대화를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세계는 그동안 이분주의에 고통을 겪다가 정치·경제·종교·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부풀어오른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가 그 키워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마바 정부 출범 이후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세계정부론’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세계’라는 전 지구적인 평화 개념을 가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세계시민’을 바탕으로 하는 칸트의 세계정부론은 ‘영구평화론’으로 이어진다. 냉전 시대 이후 세계의 유일 극으로, 전세계 국가들을 ‘우방’과 ‘불량국가’로 일방적으로 분류했던 부시 행정부의 종식과 함께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판단을 내린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에게 설명한 ‘천하태평론’도 그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중국 강역을 ‘천하’로 규정하고, 그 땅 아래서의 안빈낙도를 추구한 ‘천하태평’을 전세계적으로 확장시킬 책임이 중국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절박감에 시달린 듯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3억 명의 미국 인구 중에서 그간은 1억7천만 명의 백인들만 주류였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나머지 1억3천 명의 유색인종들도 주류가 됐다”고 미국 사회 전체의 ‘주류화’를 이야기한 바 있다. 차이와 구분을 넘어 하나가 되는 과정을 특유의 논리로 풀어내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오마바 시대의 미국이 이런 세계정부와 영구평화로 가는 토대를 쌓아야 하는데, 유독 한반도 문제,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해서만 무관심하고 그간의 정부 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는 건 모순이라는 논리를 제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설 제목이 ‘9·19 선언으로 돌아가자’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9·19 선언은 지난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된 것으로,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원고에서 “오바마 정권은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고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태도에 실망하고 위협을 느낀 북한은 극단적인 반발 자세로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남북 간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11일에 있었던 6·15 선언 9주년 기념식의 연설 제목도 ‘6·15로 돌아가자’였다.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6·15 남북 공동선언의 정신만 이행해도 지금과 같은 위기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문제는 현재 정책을 펼 수 있는 정부의 지도자들이 이를 외면한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나이와 점차 악화되는 건강에도 그의 지적 활동과 대외 활동이 중단되지 않은 것은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감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터뷰를 담은 책의 서문에 이렇게 쓴 글이 결국 남은 이들에게 남긴 유언이 됐다.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대로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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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전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만났을 때도 거듭 말씀하신 것이 있다. 한·미 정부가 북한과 했던 약속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북-미 간에 한창 기싸움이 오가면서 북한은 자극적인 말들과 행동으로 미국을 자극했고, 미국도 오바마 대통령답지 않은 정책으로 나서고 있었다. 미국의 대북 강경 조처로 인한 무력 충돌, 전면전은 아니래도 국지전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 정부의 정책과 태도를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셨다. 북한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레버리지(수단)와 카드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이셨다. 북한도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셨다.
-한반도 정세를 우려한 것인데.
=김 전 대통령은 장기적으로는 엄청난 낙관주의자셨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낙관주의자지만, 김 전 대통령에 비하면…. 김 전 대통령은 지난 5월에 한국외대 강연과 서울역 기자회견에서 ‘늦어도 가을에는 북-미 간의 직접 대화가, 6자회담이 이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9월쯤이라고 하셨는데, 8월인 지금 보라. 이미 현실이 되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우리 정부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지고 외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최근 새롭게 천착한 개념이 있다면.
=언젠가 철학자 칸트의 세계정부론과 영구평화론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대통령을 가만히 뵈면 (사색적이고 규칙적인) 칸트와 비슷한 면모가 많았다. 물론 더 현실적이셨다. 대통령은 망원경 같은 시야로 내다보면서 현미경적인 시각으로 미세한 흐름을 살펴야 하고, 사상가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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