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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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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군사정권의 탄압 이데올로기로 시작돼 민주 진영 분열·수구언론 공세 심해진 87·92년 대선 거치며 노골화
등록 2009-08-28 15:36 수정 2020-05-03 04:25
1985~1996 고배를 마시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가택연금 속에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미완의 숙제로 남은 지역주의 청산

호남당 총재, 대통령병 환자, 거짓말쟁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질기게도 괴롭힌 ‘주홍글씨’다. 권위주의 시대 집권 세력은 ‘반독재 야당 투사’ 김 전 대통령에게 이런 낙인을 찍었다. 낙인이 통했던 배경은 지역주의였다. 정확히 말하면 ‘반호남 정서’였고, ‘김대중 죽이기’ 전략이었다.

처음부터 먹힌 건 아니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에 맞설 대항마로 김대중 신민당 대선 후보가 선출됐다. 5·16 쿠데타 이후 10년 동안 독재 정권에 시달렸던 국민은 대중경제론, 주변 4개국의 남북전쟁 억제 보장, 향토예비군제 폐지 등을 내세운 ‘김대중 후보’에게 열광했다.

김대중 죽이기 전략으로 동원된 지역주의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열린 김 전 대통령의 유세에 20만 명이 몰려들었고, 부산 유세엔 50만 명이 운집했다. 선거를 9일 앞두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연 유세엔 100만 명이 모였다.

초조해진 박정희 전 대통령 쪽은 그가 호남 출신이라는 데 주목했다. 영남 유세 때마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우리 지역이 단합해 몰표를 몰아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효과는 없었다. 직전 대선인 1963년 박 전 대통령이 영호남에서 골고루 55% 안팎의 득표를 할 정도로 지역감정이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광주역 광장에서 투명 방패로 보호를 받으며 유세를 하고 있다. 노 후보 쪽은 야당 후보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해 자신의 유세를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연합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광주역 광장에서 투명 방패로 보호를 받으며 유세를 하고 있다. 노 후보 쪽은 야당 후보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해 자신의 유세를 방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연합

개표 부정, 무효표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을 받으면서도 박 전 대통령은 94만7천여 표 차이로 힘겹게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 지역에선 직전 대선 때 같은 당 윤보선 후보가 얻었던 것보다 각각 12.45%포인트, 2.52%포인트 더 득표했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직전 대선보다 부산에서 8.56%포인트 줄었다.

지역주의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계기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사정권을 상대로 한 오랜 민주화운동 끝에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이었다. 공민권을 박탈당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86년 10월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이면 다음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압박했다.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민주화 동지이자 ‘40대 기수론’의 경쟁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거들고 나섰다. “김대중씨가 복권되면 차기 대통령 후보를 김씨에게 양보하겠다”고 했다.

1987년 6·29 선언 뒤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는 실현되지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후보가 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선을 겨냥했다. 영남과 호남으로 출신 지역이 다른 민주 진영의 두 사람이 갈라서는 바람에 군사정권의 후예가 대통령이 되고, 지역주의가 심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풀이도 있다. 그해 11월1일 김대중 후보의 부산 유세가 끝난 뒤 숙소 앞에서 ‘신원미상자’ 300여 명이 난동을 부렸다. 같은 달 14일 이번엔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가 군중 난동으로 무산됐다. 두 당 사이에 공방이 오갔지만, 곧 지역감정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집권 세력의 농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역감정에 좌우되는 것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도와주는 것”이라며, 상대 후보가 자신의 연고지에서 유세를 할 경우 유세 방해 행위를 막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언론 보도는 ‘유세장 폭력’에 초점이 맞춰졌고, 노태우 후보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민정당은 잇따라 논평과 성명을 내어 두 사람이 권력을 잡으려고 지역감정을 유발한다고 맹비난했다.

민주화 이슈를 지역으로 덮은
1999년 1월24일 경남 마산역 광장에서 한나라당이 대규모 정부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정부가 한나라당 기반인 영남 죽이기에 나섰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1999년 1월24일 경남 마산역 광장에서 한나라당이 대규모 정부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한나라당 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정부가 한나라당 기반인 영남 죽이기에 나섰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도 지역주의를 이용해 공격에 나섰다. 그해 8월2일치 ‘김대중 칼럼’은 “지역감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노골화되고 있다. 지금 우리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먹혀 들어가는 한마디는 ‘전라도에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다”라고 썼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지역주의를 고찰한 저서 에서 “는 1987년 민주화 정초선거 훨씬 이전부터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한편, 선거 경쟁에 참여하게 될 야당의 3김에 대해 매우 직설적인 반대 담론을 조직했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 후보를 제외한 정당 후보들은 지역주의를 동원하지 않았다.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선호하는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조건에서 이들을 두 야당 후보 지지로 양분시키는 것은 (집권당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고, 지역주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원됐다”고 지적했다. 민주화라는 선거 이슈를 야당 후보의 지역주의 경쟁으로 덮는 한편, 지역 변수와 무관하게 ‘안정’을 바라는 보수적 유권자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민정당과 이들의 집권 연장을 바라는 세력이 지역주의를 전략으로 선택했다는 얘기다.

1992년 대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역감정 때문에 패배했다”고 자평할 만큼 반호남 정서가 노골화됐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가 어쩌고 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해.” 1992년 12월11일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이 한 발언이다. 이 자리엔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장 등 부산 지역 기관장이 모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논의했다. 바로 ‘초원복집 사건’이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집권당에 편입해 호남 고립 구도를 만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자당은 이렇게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를 철저히 활용했다.

대선에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부터 1995년 복귀 때까진 끊임없는 ‘정계 복귀 논란’의 형태로 지역주의가 동원됐다. 진원지는 를 필두로 한 언론이었다. 이 때문에 1993년 말 노무현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을 놓고 아무 근거 없이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며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민주당을 자생력이 없는 지역당으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의 음해”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을 탄생시킨 1997년 대선에서도 그를 겨냥한 지역주의 공격은 계속됐다. 김대중 주필은 1997년 11월1일치 칼럼에서 “많은 사람들이 3김 청산을 얘기해왔다. 우리는 왜 30~40년을 3김씨에게 묻혀 헤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고 ‘참신’에 대한 동경 때문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참신’이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뜻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칼럼을 비롯해 ‘3김=지역주의’란 등식으로 ‘3김 청산론’도 힘을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1987~97년 세 차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득표율은 호남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영남에서도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상승했다는 점이다. 부산은 9.14%→12.52%→15.28%, 대구는 2.63%→7.82%→12.53%, 경남은 4.50%→9.23%→11.04%로 늘어났고, 경북도 2.38%→9.62%→13.66%로 증가했다. 이는 집권 세력과 언론의 지역주의 공격에 영남 유권자들이 그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같은 시기 여당 후보의 호남 득표율은 광주 4.81%→2.13%→1.71%, 전북 14.13%→5.67%→4.54%, 전남 8.16%→4.20%→3.19%로 계속 떨어졌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한’이라고도 표현한 바 있는 ‘반호남 정서에 대한 반발’이 표의 응집력을 계속 높여온 셈이다.

‘호남 지지 얻은 영남 대통령’ 나왔지만…

이어진 두 차례 대선에서도 영남 출신이 호남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독식하는 지역 구도는 지속되고 있다. 정당이 유권자의 다양한 갈등과 이해를 대표하고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역 구도에 의존하고, 유권자도 정당의 변별력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가까운 쪽의 손을 들어주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역 차별에 결코 승복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득을 보고 손해를 보는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대구·경북 지역과 부산·경남 지역에서 소박한 애향심을 악용한 특권층이 혜택을 보는 것이다. 영남 농민이나 호남 농민이나, 영남 중소기업이나 호남 중소기업이나 똑같이 못산다.” 새삼스럽지만 누가 지역주의로 이득을 보는지 눈을 크게 떠보라는 당부로 들린다. 누가 내게 ‘빵과 장미’를 줄 수 있는지 가려내야 한다는 당부 말이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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