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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졸업했지만 IMF 체질화


빈 곳간 채우려 집안 통째로 개방…정리해고·양극화 폐해 속 생산적 복지 확충
등록 2009-08-28 16:55 수정 2020-05-03 04:25
IMF 졸업했지만 IMF 체질화. 사진 한겨레 자료

IMF 졸업했지만 IMF 체질화. 사진 한겨레 자료

1997~2002 위기를 이기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속에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외환위기 극복에 매진해 임기 중인 2001년 8월23일 IMF 관리 체제를 벗어났다.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혹독했고 위기를 극복한 과정은 명암을 남겼다.

1997년 11월21일 밤 10시. 임창열 신임 경제부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0여 일 전만 해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여건)이 튼튼하다”(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던 김영삼 정부였다. 97년 12월3일 임창열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캉드쉬 IMF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제금융을 위한 정책 이행각서에 서명한다. 그 뒤 ‘경제 주권’은 IMF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1997년 12월18일 김대중 후보는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당선에는 역설적으로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 대통령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김영삼 정부는 ‘국제화’ ‘세계화’란 이름으로 규제 완화·민영화·시장개방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같은 정책의 이면에는 김영삼 대통령 임기 중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려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OECD는 가입 조건으로 자본시장의 자유화와 거시경제의 안정을 요구했다. 그 같은 과욕의 마지막은 ‘곳간의 거덜’이었다.

국민은 국가 부도의 위기를 야기한 정치 세력을 심판하길 원했다. 성장과 개발로 상징되는 이전과는 다른 패러다임을 요구한 것이다.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 교체로 김대중 대통령이 물려받은 건 외환보유고 단돈 39억달러, 원-달러 환율 1965원, 종합주가지수 379포인트였다. “우리에게는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1998년 2월26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그는 취임 전후 외화 유동성 확보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김 대통령은 대표단 파견과 IMF 등과의 자금 지원 합의 등을 통해 취임 뒤 불과 한 달 만에 214억달러를 도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국가 부도 사태를 일단 막았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환율은 안정됐고 금리도 내려갔다.

계파·인맥 대신 능력으로 경제팀 구성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를 찾아 경제인·금융인을 만나 한국에 투자해달라는 설명회를 열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정을 끌고 나갔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엄청난 일정을 소화했다. 외환 유동성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끈 김대중 정부는 바로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 부문에 걸친 강력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IMF는 구제금융을 주는 대가로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긴축재정 정책을 요구했다. 이에 김대중 정부는 은행 퇴출과 부실기업 정리, 빅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개선 등 사상 유례없는 구조조정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1998년 1월12일 경기 일산 자택으로 조지 소로스 퀀덤펀드 회장을 초대해 만찬을 열었다. 당시 김 당선인은 국제경제기구와 금융계 인사들을 잇따라 국내로 초청해 활발한 경제외교를 펼쳤다. 사진 한겨레 자료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1998년 1월12일 경기 일산 자택으로 조지 소로스 퀀덤펀드 회장을 초대해 만찬을 열었다. 당시 김 당선인은 국제경제기구와 금융계 인사들을 잇따라 국내로 초청해 활발한 경제외교를 펼쳤다. 사진 한겨레 자료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계파나 인맥보다 능력을 우선시한 인사를 했다. 당시 경제팀은 이른바 ‘DJP 연합’의 한 축인 자민련 몫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코드에 얽매이지 않았다. 1기 경제팀의 핵심인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오히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진영을 도운 전적이 있었지만, 김 대통령은 이를 괘념치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국민들과 소통하면서 풀었다. 취임 전 ‘국민과의 대화’에서 김 대통령은 “금고가 비었다”고 고백했다. 과거 정권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외환위기 직전까지 펀더멘털을 얘기하던 김영삼 정부였다. 또 김 대통령은 “실업자가 1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나는 오랫동안 노동자를 위해왔지만 (정리해고는) 불가피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털어놨다. 대통령이 솔직하게 국민과의 소통에 나서자 국민도 호응을 보냈다. 장롱 속에 모아둔 돌반지·금반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룹 총수 만나 재벌개혁 압박

김대중 대통령은 입으로만 경제를 나불대는 대통령과 달랐다. 김 대통령은 재벌 개혁이 미적거리자 “구조조정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에 넣을 수 있다”며 그룹 총수를 만나 압박했다. 그 뒤 ‘대마불사 신화’는 붕괴됐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몰락했다. 대북사업에 적극 나섰던 현대그룹이 쪼개졌다. 쌍용·해태·진로 등 재벌 그룹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과거 30대 그룹 중 16개가 퇴출됐다. 정경유착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호탄이 됐다. 무리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자취를 감췄고, 기업의 경영 방침도 성장 위주에서 수익 위주로 바뀌었다.

김대중 정부는 부실의 싹을 근본적으로 도려내기 위해 부실 정도가 심한 은행을 정리하는 한편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1998년 6월 자력으로 경영 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동화·동남·대동·경기·충청은행을 퇴출시켰다. 정부는 은행의 구조조정을 위해 99년에만 45조2천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보험사 등 비은행권 금융기관들까지 합하면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은 64조원에 이르렀다. 99년 정부예산과 국민총생산(GNP)이 각각 80조원과 486조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투입한 공적자금은 막대한 규모였다. 공적자금은 97년 외환위기 발생 이후 2006년까지 168조3천억원이 투입됐다.

1998년 1월 스포츠 스타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금고가 비었다”고 고백하며 국민과의 소통으로 IMF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곧바로 국민도 호응을 보냈다. 장롱 속에 모아둔 돌반치·금반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진 한겨레 자료

1998년 1월 스포츠 스타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금고가 비었다”고 고백하며 국민과의 소통으로 IMF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곧바로 국민도 호응을 보냈다. 장롱 속에 모아둔 돌반치·금반지까지 들고 나온 금모으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사진 한겨레 자료

이같은 노력으로 김대중 정부는 2001년 8월 IMF에서 빌린 195억달러 전액을 조기 상환함으로써 4년 만에 IMF 관리 체제를 탈피했다.

하지만 IMF의 성공적인 졸업 뒤에는 ‘신자유주의’라는 그림자도 드리워졌다. 김대중 정부는 규제 완화, 민영화, 시장개방, 정부 역할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를 외환위기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신자유주의 물꼬 터줘” 비판받아

IMF가 남긴 명예퇴직과 이에 따른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문제가 됐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 물꼬를 허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IMF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자본시장을 개방해 한국을 글로벌 경제권에 본격적으로 편입시켰다. 김 대통령은 1998년 5월 자본 자유화와 외국인 투자 유치를 명분으로 내걸고 증권거래업과 선물거래업 등 21개 업종을 외국인에게 전면 개방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철폐된 것도 이때다. 외환시장은 급속히 안정세를 찾았다. 연초 300선 밑에 머물던 주식시장도 그해 말 600선 부근까지 올랐다. 하지만 외국 자본들은 외환 자유화를 기회로 부도 위기에 몰려 헐값이 된 국내 알짜 기업들의 지분을 대거 거둬갔다.

1997년 12월23일, 대통령에 당선된 지 사흘 만에 김대중 당선인은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비밀리에 방한한 데이비드 립턴 미 재무차관을 만났다. 김 대통령은 새 정부를 못미더워하던 미국에 ‘정리해고’를 포함해 IMF 협약보다 더 강도 높은 개혁을 약속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은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한 의도가 강했다. 외국인들은 해고가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기업 토양으로 기업 구조조정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봤기 때문이다. 50년 정치 기반인 노동계가 결사 반대한 정리해고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외환위기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도 다각도로 펼쳐나갔다.

외환위기를 맞아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노숙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양극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이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외환위기를 맞아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노숙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양극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이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면서 일자리가 노동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사 간 불신이 격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감소세를 보이던 노동쟁의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한국노동연구원 자료를 보면, 1994년 연 4만 명 수준이던 노동쟁의 참가자 수는 1998년 14만6천 명 수준으로 다시 증가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주로 임금 인상 목적의 쟁의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구조조정·고용안정·근로시간·복직 등이 핵심 이슈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도 “지금은 식민지 시대가 아니므로 외국 자본을 많이 들여올수록 좋다”며 신자유주의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섰고, 대우자동차의 해외 매각을 추진했다. 노동자 파업 때 정부 개입을 자제한 것 역시 외환위기 뒤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사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8월 현대차 파업 사태를 노무현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가 중재해 해결했을 때도 칭찬하는 대신 “정치권의 지나친 개입은 유감으로, 시정돼야 할 것”이라고 질책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시작은 경제위기가 불거지면서 흐물흐물 나온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적극 채택한 사례로는 흔히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꼽힌다. 두 나라 모두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에 헤맸을 때다. 국가 부도로 내몰린 우리나라 역시 신자유주의 해법을 마냥 외면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IMF의 고금리 정책으로 시중금리는 연 30%를 넘나드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살인적인 고금리 탓에 1998년 초 매달 3천여 개 기업이 부도로 문을 닫고 실업자가 하루 1만 명씩 쏟아지는 극한 상황이 전개됐다. 자영업이 무너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적 약자들이 노숙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사회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반면 금융자산이 많은 고소득층은 자산을 계속 불렸다. 양극화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80 대 20의 사회’가 도래한 것도 외환위기 직후부터다.

기초생활보장법 등 안전망 확대
김대중 정부 5년 경제지표

김대중 정부 5년 경제지표

김대중 정부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노동의 유연성 등 신자유주의 기초를 마련한 건 노동법을 날치기하려던 김영삼 정부 때였다. 1997년 IMF는 한국 경제를 살릴 처방에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는데, 당시 김대중 후보는 원론적으로 검토해보자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당시 이회창 후보와 조·중·동은 ‘김대중 때문에 IMF 지원을 못 받게 된다. 한국이 국가 부도를 맞게 된다’는 흑색선전을 했다. 결국 김대중 후보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면 이만큼의 복지정책을 지켜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랬다. 김대중 정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은 잊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들어 복지정책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됐다. 외환위기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 저소득층을 복지정책을 통해 끌어안으려는 시도였다. 경제 영역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현재 한국 복지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 등이 김대중 대통령 때 마련됐다. 1998년부터 3년 동안 20조원 규모의 실업대책이 쏟아졌다. 국민연금 확대 실시 등 사회 안전망을 확대하는 기반정책도 추진됐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생산적 복지란 시혜적인 복지가 아니라 능동적인 복지제도를 뜻한다. 사회적 약자를 사후 시혜적으로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할 기회를 더 만들어주고, 일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교육과 훈련을 통해 복지를 제공한다는 개념이다.

가장 기본적인 복지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산적 복지 이념과 사회 각계의 합의를 바탕으로 1999년 9월 관련법이 제정돼 1년 뒤인 2000년 전면 시행됐다. 99년 1조원도 안 됐던 저소득층 생계비·의료비 지원은 이듬해인 2000년에 4조원으로 급증했다. 김대중 정부는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지난 20년간 끌어온 의료보험 관리운영 체계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 의료보험제도를 출범시켰다.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한국 경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한국 경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복지재정과 그 수혜자가 크게 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인 1997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2조8510억원으로 국가예산의 4.2%를 차지했으나, 2002년에는 7조7750억원으로 그 비중이 7.3%로 커졌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도 97년 37만 명에서 2002년 155만 명으로 늘어났다. 공무원의 대규모 감축이 진행되던 상황에서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은 3천 명에서 5500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런 복지정책이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전면적으로 막기엔 한계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인 97년 1분기에 도시노동자 가구 상위 20%의 평균소득이 하위 20%의 평균소득보다 4.81배 많았는데, 2002년 1분기에는 5.40배로 벌어졌다.

DJ노믹스의 명암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을 일컫는 ‘DJ노믹스’의 기본 명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이다. ‘분배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추구했다. 시장은 철저하게 경쟁과 자율이라는 시장원리에 맡기고, 저소득층 지원은 복지정책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DJ노믹스의 고갱이였다.

김태동 교수는 “DJ 정부의 경제정책의 흐름은 ‘질서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적 자본주의’였다. 질서 자유주의는 나치 히틀러 체제 같은 전체주의적 경제를 지양하고 시장에 좀더 힘을 실어준다는 거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뒤 서독의 경제성장 발전을 모델로 한다. 인본주의적 자본주의는 서민 등 어려운 경제 주체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다”라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돋보인 경제·복지 정책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과 우리나라 복지체제의 바탕을 설계한 점이다. 하지만 미국식 시스템 도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를 받아들였고 개혁의 피로를 빨리 느껴 재벌과 금융 개혁은 기대만큼 하지 못했다. 섣부른 규제 완화로 신용카드 위기를 방조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신용카드 대란으로 이어져 서민들이 고통을 받았는데, 이는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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