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지식정보화 강국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놓았고 벤처산업 육성을 통해 인터넷 산업이 오늘날 우리 경제의 한 축이 되는 기틀을 다졌다. 많은 인터넷 기업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 많은 빚을 지고 있다.”(국내 인터넷 관련 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보도자료, 8월19일)
‘정보통신기술(IT)과 김대중.’ 독재에 맞서 오랜 민주화 투쟁을 해온 정치인 DJ와 관련해 ‘정보통신 대국의 기틀을 닦은 대통령’이란 평가는 어딘지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5년간 우리나라 정보기술 부문은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1998년 1만4천 명에 불과하던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2002년 1040만 명으로 급증했다. 국내 IT 산업의 총생산액도 1997년 76조원에서 2002년 189조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8.6%에서 2002년 14.9%로 확대됐다. 김대중 정부 초기 163만 명에 불과하던 인터넷 이용자는 5년 만에 2600만 명을 돌파했고, 정보통신 분야의 무역흑자는 97년 94억달러에서 2002년 168억달러로 늘었다. 이런 무역수지 흑자는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조기에 상환한 원동력이 됐다.
젊은 고학력 실업자들 흡수 목적DJ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일성으로 ‘지식기반 경제’와 ‘정보 대국’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1998년 취임사에서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 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며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IT 강국의 초석을 닦은 대통령’이란 표현보다는 이른바 ‘벤처 공화국’이란 시각에서 김대중 정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벤처 시대는 DJ 취임과 동시에 도래했다. DJ는 취임하자마자 △향후 5년간 벤처기업 2만 개 창업 지원 △9천억원의 벤처 지원자금 마련 △창업 벤처기업에 3억원씩 지원 등 각종 벤처 육성정책을 쏟아냈다. 1998년 5월 ‘벤처산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 시안’을 내놓은 데 이어 그해 6월에는 재정경제부가 파격적인 ‘코스닥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집권 초부터 막대한 벤처 지원자금이 뿌려졌다. ‘벤처기업 전도사’로 불리는 이장우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이미 김영삼 정권 말기에 코스닥 시장이 설립되고 벤처기업 육성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다만 벤처기업을 연구·개발한 YS는 이것이 대단한 정책인지 당시에 잘 몰랐던 반면, DJ는 실제로 생산과 마케팅을 주도한 격”이라며 “흥미롭게도 YS 정권의 차관급 이상 인물 중 DJ 정부 때도 계속 장·차관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정해주 전 국무조정실장 등 벤처 정책을 주도해온 관료들이었다”고 말했다.
DJ가 주도하는 벤처기업 육성 붐을 타고 벤처기업(2001년 기준)은 GDP의 3%(16조원), 총수출의 4%(56억달러), 총고용의 2%(34만 명)를 차지하는 등 급속히 성장했다. 벤처 창업도 봇물을 이뤘다. 벤처기업 수는 중소기업청이 벤처기업 인증 업무를 시작한 1998년 2042개에서 2001년 말까지 한 달에 500여 개씩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2001년 4월 1만 개를 돌파하면서 그 정점에 달했다.
DJ는 왜 벤처기업 육성에 나선 것일까? 한 가지 설명은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부 이규성 장관과 정덕구 차관을 중심으로 몇몇 경제관료들이 대량 실업의 타개책으로 벤처기업을 지목했다는 설이다. 젊은 고학력 실업자들을 대거 벤처로 흡수하려고 한 것인데, 그러려면 시중 돈이 벤처로 몰리도록 물꼬를 터야 했다. 또 다른 설명은 DJ가 평소에 갖고 있던 경제철학이 외환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당시 미국의 신경제 붐을 타고 ‘벤처’로 현실화됐다는 해석이다. DJ가 젊은 시절부터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체제’를 꿈꿔왔는데, 집권 초기부터 ‘모험·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갖춘 벤처기업’을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구상했다는 얘기다.
벤처 특성과 DJ 경제 논리 맞아떨어져이와 관련해 김대중 정부 초기에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추준석 동아대 석좌교수는 “DJ는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계셨다. 당시의 벤처 육성책에는 실업 대책의 일환이란 측면과 벤처를 통해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려는 DJ의 의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장우 교수도 “당시 실업 대란 속에서 벤처 육성책이 나오긴 했으나 그 근저에는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창의적인 수많은 벤처기업들’을 생각하고 있던 DJ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DJ의 오랜 ‘중소기업 중심 경제’ 구상이 벤처 육성 모델로 가닥을 잡았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벤처기업의 특성과 DJ가 갖고 있던 시장경제 논리가 ‘역사적 복권’처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벤처 시장을 지배하는 법칙은 수많은 기업들이 세워지고 쓰러지고 또 살아남는다는 것인데, 이는 자유로운 ‘시장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체제와 맞닿아 있다. 국가 개입과 산업정책에 의해 성장하는 관치경제 시대의 재벌기업과 달리, 벤처기업은 DJ가 주창해온 민주적 시장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기업 조직이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천명한 DJ노믹스의 전면에 벤처기업이 배치됐다. DJ가 연일 벤처 이야기를 꺼내는 등 벤처기업에 온 신경을 쓰면서 대기업에서 벤처업계로 자리를 옮기는 사람도 많았다.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으니 그 흐름을 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크게 볼 때 DJ의 벤처 육성정책은 조기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신용카드 거품 속에서 벤처로 돈이 우르르 몰리면서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DJ의 벤처 정책은 금융과 산업 영역뿐 아니라 온 나라를 전방위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가히 ‘벤처 공화국’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벤처 창업과 취업에 나섰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벤처 정신’이 외환위기의 암울함 속에서 활력소로 등장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테헤란밸리를 중심으로 ‘벤처 대박’ 신화가 연일 화젯거리가 되면서 너도나도 떼돈을 벌겠다며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묻지마 투자’였다. 벤처 육성정책이 실제로는 ‘벤처 투자 광풍’으로 왜곡돼버린 것이다.
코스닥 거품 꺼지며 고통급기야 2001년부터 벤처기업들은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벤처 거품은 2000년 봄을 정점으로 급속히 붕괴됐고, 정치권력과 벤처기업인들의 ‘검은 공생’(이른바 벤처 게이트)이 잇따라 터져나왔다. 정부의 벤처 육성정책이 만들어낸 음습한 그늘이었다. DJ의 벤처 공화국은 측근인 권노갑씨의 구속 등을 거치면서 우울한 모습으로 종지부를 찍고, 대신 ‘게이트 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한 제2금융권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초기에 스타급 벤처기업인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코스닥에서 큰돈을 거머쥔 사람들이 정치권과 줄을 대면서 여권 정치인들도 당시 '돈 풍년'을 만났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외환위기는 DJ에게 한국 경제의 틀을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당시의 조급한 벤처 육성정책에 편승해 대다수 벤처기업들은 손쉽게 투자를 받거나 코스닥에서 큰돈을 벌었고, 결국 도전과 패기로 대표되는 역동적 벤처 정신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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