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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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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눈물을 닦아준 ‘선생님’


‘민추협’ 시절부터 시작된 민가협과의 인연…“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분”
등록 2009-08-28 14:57 수정 2020-05-03 04:25

하필이면 광장엔 구슬픈 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머리에 보랏빛 수건을 두르고 이 노래를 부르던 어머니의 가슴엔 이날 검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 2009년 8월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날,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이들은 고인과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빨갱이 엄마’로 손가락질당하던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던 사람은 영정 속 사진으로 남았다. 하필이면 민가협 어머니들이 모여앉은 천막 앞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자식과 남편을 감옥에 보냈던 민가협 어머니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분향소가 있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자식과 남편을 감옥에 보냈던 민가협 어머니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분향소가 있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훌륭한 아들을 키웠다” 해주다

“그때는 민가협도 없었어. 구속학생 엄마들이 민추협 강당에 살았지. 자식들 구해달라고.” 민가협 어머니와 김대중 ‘선생님’의 인연은 그렇게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가협의 산 역사, 임기란 어머니는 말을 시작하며 “아이고, 지금도 창피해”라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그는 고인과의 인연을 돌이킨다. “새벽 2시에도 여러 번 (자식들) 살려달라고 선생님 댁으로 뛰어 들어갔잖아. 그러면 부부가 눈곱을 떼면서 맞았어. 우리 얘기를 하고 나면, 식은 밥이라도 비벼먹고 나왔지. 그냥 보내지 않았어.”

그렇게 어머니들은 외로웠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아래서 ‘엄마의 편’이 돼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남편은 말렸고, 친척도 외면했다. 그렇게 외로운 손들을 잡고 당시 김대중 ‘선생님’은 “훌륭한 아들을 키웠다”고 위로했고, 어머니들은 ‘우리 아들이 몹쓸 짓을 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부심을 얻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땅을 치고 울고 싶은 심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부음이 전해진 다음날, 10여 명의 민가협 어머니가 마치 자신이 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영안실이 있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제야 말한다. 임기란 어머니는 “솔직히 양김이 똑같지 않았어. 모두들 상도동을 ‘영삼이네’라고 했다면, 동교동은 ‘선생님댁’이라고 했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거든”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어머니들은 저마다 가슴에 고인과의 추억을 하나씩은 품고 있다.

1989년 방북 사실이 알려져 옥살이를 했던 서경원 전 의원의 부인 임선순씨는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에 어렵게 김대중 총재를 찾아갔는데, 총재님 모르게 북한에 갔으니 죄송하다고 말하니까 오히려 ‘서경원 의원 덕분에 내가 세계적 인물이 되었다’고 위로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어느 날에는 이희호 여사가 아이 넷을 혼자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당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주고 옷가지를 챙겨주었다”고 돌이켰다.

취임하자마자 청와대로 초대

그래서 서경원 전 의원 부부는 이날 아침 8시 한달음에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이렇게 오래된 인연이 있으니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분”이라는 임씨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눈물이 나왔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다음날, 당시 김대중 당선인은 서울 수유리 4·19 묘역을 찾았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새벽같이 묘역에 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동지들’은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앞서 이별도 있었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선생님’이 영국으로 떠날 당시엔 30여 명의 민가협 어머니가 눈물로 배웅했다. 그래서 맞잡은 손의 감격은 더욱 컸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이선실 간첩단 사건’으로 아들을 감옥에 보냈던 김성한 어머니는 “지나고 보니 김대중 대통령도 그 사건의 피해자였고,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였다”며 “그렇게 ‘빨갱이’ 소리를 듣는 억울한 심정을 아는 사람으로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당연히, 고인은 취임하자 곧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을 청와대로 초대했다. 임기란 어머니는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청와대에서 불러도 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민가협이 공식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선생님과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집이 동교동에서 청와대로 바뀌어도 성역은 아니었다. 임기란 어머니는 “청와대로 무시로 쫓아가 사정을 말했다”며 “감옥에 있는 누가 아프고, 누구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지 정리해서 명단을 건네면 대부분 특별사면에 반영됐다”고 전했다. 현재 민가협 의장인 이영 어머니는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을 북한으로 송환한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장기수 후원사업을 해온 민가협 어머니들은 나중에 평양을 방문해 송환된 장기수들을 만나는 기쁨도 누렸다. 아들이 감옥에 가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한총련 사건으로 김대중 정부하에서 아들을 감옥에 보냈던 조순덕 어머니는 “그래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한총련 학생들이 빨리 석방되고 수배도 많이 풀렸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권의 ‘한총련 죽이기’에 지쳤던 이들은 그렇게 위로를 얻었다. 역시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민혁당 사건’으로 아들을 감옥에 보냈던 박영옥 어머니는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나오면서 사회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고, 비록 자식이 감옥에 있었어도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고 돌이켰다.

물론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있었다. 조순덕 어머니는 “김영삼 정권 시절에 나온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이 풀리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것은 여전히 한으로 남는다. 박영옥 어머니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했으면 정말로 좋았겠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1986년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민가협 활동을 시작한 이정님 어머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6번 만났다”고 또렷이 기억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다음에 만나서 ‘인권 대통령’이지 ‘경제 대통령’이 아니니 꼭 국가보안법을 없애달라고 당부했다”고 돌이켰다. 비록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양심수 한 명도 포함 안 된 이번 특사

시절이 하수상하니 그리움은 커진다. 임기란 어머니는 “올해 8·15 특사에 양심수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며 “아예 양심수 개념조차 모르는 정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순덕 어머니는 “20년 넘게 이어진 민주화 흐름이 끊어질 위기가 닥치니 서거가 더욱 원통하다”며 “두어 해만 더 사셨어도…”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어머니의 목소리에 현 대통령이 귀를 막으니 떠나간 대통령이 더욱 그리워진다. 인터뷰 내내 민가협 어머니들은 숙연한 얼굴로 고인을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임이 떠났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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