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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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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권리보다 힘이 세다


2000년대 이후 아동 노예노동 충격 발표 잇따라…
아동노동감시위원회의 검증받는 농장 절반밖에 안 돼
등록 2009-01-22 17:51 수정 2020-05-03 04:25
코트디부아르 시나코송 마을에 사는 드라만(10)이 카카오 열매가 가득 담긴 고무통을 머리에 이어 옮기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시나코송 마을에 사는 드라만(10)이 카카오 열매가 가득 담긴 고무통을 머리에 이어 옮기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12살 소년 에브라임 킨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시트(낫)로 카카오를 수확한다. 마스크도 없이 농약을 치기도 한다. 코트디부아르는 만 13살 미만 어린이의 노동, 어린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노동을 금지한 국제노동기구(ILO) 조약을 2003년 2월 비준했지만, 에브라임한텐 너무 낯선 얘기다. “모든 아동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해서는 안 되며, 건강과 발달을 위협하고 교육에 지장을 주는 유해한 노동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유엔(UN) 아동권리협약 32조도 먼 나라 이야기다. 에브라임이 사는 시니코송 마을의 다른 어린이들도, 또다른 카카오 재배 마을의 어린이들도 에브라임과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 ‘아동 노예노동 반대’ 라벨

빈곤은 권리보다 더 힘이 센 것일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123달러(국제통화기금 2008년 추정치)에 불과한 코트디부아르에선 13만 명의 어린이가 카카오 농장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일하는 어린이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카오 수출은 코트디부아르 세수의 40%, GDP의 10%를 차지하는 절대적인 산업이지만 대부분 소규모 가족농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구 2천만 명 가운데 600만 명 이상이 카카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게 코트디부아르 정부의 추산이다. 이 나라에서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노동력’으로 흡수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코트디부아르보다 더 가난한 이웃 나라의 어린이들이 코트디부아르로 노예로 팔려가 강제노동에 착취당한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잇따랐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2000년 9~12살 어린이 1만5천 명이 카카오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 강제노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천~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몇 푼 안 되는 돈에 카카오 농장으로 팔려가 하루 10시간 이상씩 강제로 일하고 수시로 매를 맞는다는 국제 인권단체와 각종 언론의 보도도 나왔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아동노동 근절 활동을 펴고 있는 독일기술협력공사(GTZ)는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대규모 국영농장이 사유화되고 있었고, 생산비는 뛰어오르는 반면 카카오 가격은 정체돼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말리, 부르키나파소, 토고 등 더욱 가난한 이웃 나라로선 값싸고 어린 노동력을 넘기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곳이 코트디부아르였다”고 그 원인을 추정했다. 이 때문에 아동노동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은 코트디부아르 정부가 아닌 국제사회였다.

2001년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 톰 하킨과 하원의원 엘리엇 엥겔이 미국에서 판매되는 초콜릿 제품 가운데 노예노동으로 생산되지 않은 제품에 ‘아동 노예노동 반대’ 라벨을 붙이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들은 또 코트디부아르에서 카카오를 들여오는 기업, 초콜릿 제조자협회, 국제노동기구 등과 함께 국제노동기구 조약 182호에 따라 카카오 생산 단계에서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을 2005년 6월까지 근절하겠다는 내용의 ‘하킨-엥겔 협약’(Harkin-Engel Protocol)을 체결했다. 협약은 생산지에서 어린이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국가적인 검증 체계도 갖추도록 했다. 한편 두 의원은 이때까지 협약이 준수되지 않으면 코트디부아르에 무역제재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애초 아동노동을 부인하던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무역제재 압력에 태도를 바꿨다. 초콜릿 생산업체와 세계 각국 정부,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참여와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국제적인 지원의 손길이 이어졌고, 코트디부아르 정부도 아동노동감시위원회를 꾸려 대책 마련에 나서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코트디부아르 수브레의 한 마을 앞에 ‘인신매매와 아동의 가혹한 노동 금지’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 표지판은 독일기술협력공사와 아동노동감시위원회의 아동노동 근절 검증 시스템이 적용되는 마을을 뜻한다.

코트디부아르 수브레의 한 마을 앞에 ‘인신매매와 아동의 가혹한 노동 금지’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 표지판은 독일기술협력공사와 아동노동감시위원회의 아동노동 근절 검증 시스템이 적용되는 마을을 뜻한다.

농약 주기, 무거운 짐 나르기… 조약 위반

우선 협약에 따라 시민단체·초콜릿 제조업체 등이 참여하는 ‘국제 카카오 재단’(ICI)이 생겼다. 재단은 104개 지역의 공무원과 지방경찰, 시민단체 등과 손잡고 어린이를 존중하고 가혹한 아동노동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교육을 펼쳤다. 어린이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키지 않았음을 검증하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검증의 기본은 국제노동기구 조약 138호(만 13살 미만 노동 금지 등 노동 연령제한)와 182호(아동 인신매매, 강제·의무 노동, 아동의 보건·안전을 위협하는 노동 등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금지)다. 이에 따라 △어린이들이 도끼로 나무를 베는지 △불을 다루는지 △화학비료나 농약을 주는지 △무거운 짐을 나르는지 등을 1년에 한 번씩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2004년 설립된 코트디부아르 정부기관인 아동노동감시위원회는 연간 12억세파프랑(약 34억8천만원)의 예산을 이 사업에 지원하고 조사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 차례 연장한 아동노동 근절 완료 기한이 지난해 7월로 끝났는데도 코트디부아르가 아동노동의 어두운 터널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 것 같다. 검증 시스템에 따라 검증을 받는 곳이 카카오 생산지의 절반밖에 안 된다. 에브라임의 마을에도 검증 시스템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에브라임이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이 금지된 아동노동 형태지만,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있다.

재단과 위원회는 이 검증 시스템의 적용 범위가 생산지 전역으로 확대되는 시기를 2010년 6월로 잡고 있다. 미국의 공정무역 단체인 글로벌 익스체인지의 아드레인 피치-프랭켈 공정무역국장은 “미국에 판매되는 초콜릿에 ‘아동 노예노동 반대’ 라벨을 붙이는 것을 의무화한 게 아니라 제조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의 아동노동 뿌리뽑기가 늦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2002년 4월엔 독일기술협력공사가 코트디부아르 정부와 함께 ‘아동매매·가혹한 아동노동과의 전투’(LTTE)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동안 공사는 인신매매되던 어린이 90명을 찾아내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아동매매상 8명을 법정에 세웠다. 또 인터폴과 연계해 현지 경찰에게 아동매매가 의심되는 차량을 적발하는 방법도 교육했다. 6곳의 지부에선 농민 대표 8300여 명을 상대로 어린이에게 시켜선 안 되는 일, 가혹한 노동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악영향 등을 교육하고, 그림책으로 된 자료를 나눠줬다. 공사는 농민 대표들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이웃에게 이런 내용을 알렸을 것으로 기대한다. 독일 정부는 공사가 벌이는 이런 사업에 올해 75만유로(약 13억6500만원)를 지원할 계획이다.

“한국 정부도 지원하기를”

그래도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공사가 올해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수도 아비장에서 450km 떨어진 도시 수브레로 팔려온 아이들만 4800명에 이른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은 부지기수다. 프랭크 브레머 독일기술협력공사 아비장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동매매상들은 가난한 이웃 나라의 부모들한테 가서 ‘키워주겠다’며 아이들을 데려와 코트디부아르의 농민들에게 팔아넘겼고, 농민들은 3년 동안 돈도 안 주고 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가족농의 경우에도 ‘학교가 멀다’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아이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한다.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들게 하거나, 마스크도 씌우지 않은 채 독한 농약을 뿌리게 한다. 선진국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카카오를 생산하는 이런 어린이들을 돕는 데 관심을 안 가질 순 없는 일 아니냐. 한국 정부에서도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

아비장(코트디부아르)=글·사진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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