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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올해의 판결] ‘직업 선택의 자유’ 도그마를 벗어나다


헌법재판소의 시각장애인 안마사 독점 합헌 결정…
다음 논쟁은 ‘독점권 없이도 생존권 보장’으로
등록 2008-12-26 17:12 수정 2020-05-03 04:25

지난 10월 헌법재판소는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한 의료법 조항에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다수 의견은 “시각장애인의 이동권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안마사라는 직업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극소수의 직업 가운데 하나”라며 “시각장애인의 복지와 인간다운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안마 직업을 독점시키는 방법이 불가피한 입법적 선택”이라고 합헌 이유를 밝혔다. 또 “다른 대안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교육·고용 등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받아온 소수자로서 실질적인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우대하는 조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독점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 변화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안마사 독점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 변화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12년 자격증 생긴 이후 관습법으로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연원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경성제생원(국립 서울맹학교의 전신)에서는 시각장애인에게 침술과 안마술을 가르쳤다. 안마사 자격 제도를 마련해 이때부터 시각장애인에게 적합한 직종으로 육성한 것이다. 1962년 보건사회부 예규, 1975년 의료법에서는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하도록 규정했고, 1984년 안마사에 관한 규칙에서는 시각장애인에 ‘한정해’ 안마사 자격을 주도록 했다.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독점은 마치 관습법처럼 굳어진 셈인데, 이 규정은 2000년대 들어 빈번하게 헌법 심사의 도마 위에 오른다. 지난 2003년에는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주는 규정을 법률이 아닌 시행규칙에 집어넣은 것은 잘못”이라며 법원이 위헌심판을 청구했다. 심리 결과, 위헌이 5명, 합헌이 4명이었다. 위헌 의견이 더 많았지만 위헌 결정을 위한 정족수(6명)에서 1명 모자라 이 조항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효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6년에는 3년 전 청구 이유에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독점이 일반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잉 금지”라는 취지가 덧붙여져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결과는 7 대 1의 압도적인 위헌 결정이었다(재판관 1명이 외국 출장 중이어서 8명이 심리).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독점 권한이 무너진 것이다.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은 위헌 결정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서울 마포대교 난간에서 펼침막을 흔들며 한강으로 뛰어드는 ‘고공농성’을 벌였다. 생활고를 걱정한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투신자살하기도 했다. 강하게 반발하던 안마사들은 대체법률안을 마련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듣고서야 25일 만에 농성을 풀었다.

그 뒤 정치권은 대체입법 작업에 착수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경쟁적으로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내놓았고, 국회는 여야 합의로 2006년 8월 이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헌재가 위헌이라고 판단한 시각장애인에 대한 안마사 독점권을, 국회가 다시 인정해주는 법률을 만든 것이다. “관련 조항을 법률이 아닌 규칙에 규정한 것은 잘못”이라는 헌재의 의견만 받아들여 독점 조항을 법률에 집어넣었을 뿐, 헌재의 결정 취지를 사실상 거스른 내용이었다. 다시 한번 헌법적 심사가 불가피했다. 헌재의 위헌 결정이 이후 입법의 ‘내용’을 강제할 수 있는지도 중요한 법률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위헌 결정 뒤, 경쟁적으로 법률개정안 내놔

지난 10월 결정에서 헌재는 이에 대한 대답도 내놨다. 비시각장애인은 안마사를 할 수 없다는 ‘비맹(非盲) 제외’ 기준이 과잉 금지 원칙에 어긋난다는 헌재 결정의 내용이 이후 법률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려면 이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린 재판관이 위헌 정족수인 6명 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2년 전 위헌 결정에서는 7명의 재판관 중 5명만이 이 이유를 댔기 때문에(나머지 재판관은 관련 조항을 법률이 아닌 규칙에 규정한 형식상의 문제를 위헌 이유로 댐)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독점권을 다시 인정하는 입법 자체가 위헌적 행위는 아니라는 논리였다. 재판관들은 자신들의 권한까지 제한적으로 해석하면서 안마사 대체입법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소수자·약자의 편을 들어준 것이기에 환영받을 만한 결정이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헌재가 “다른 사람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2년 전 판단을 정면으로 뒤집은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올해의 판결’ 심사 과정에서도 여러 위원들이 “헌재가 여론에 굴복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2006년과 2008년 결정 사이에 무려 7명의 재판관이 바뀌었다. 인적 구성이 변하면서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되고 다수의견이 소수의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답이 어느 쪽이건 간에, 지난 세 번의 헌법 심사 과정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은 헌재의 ‘자기부정’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독점을 둘러싼 찬반 논리가 더욱 풍성해졌다는 점이다.

합헌 쪽에서는 “국가는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 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헌법 34조 5항을 기본으로 한다. 이어 △공간 이동과 기동성이 거의 필요하지 않고 촉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사 독점권을 인정하는 것이 생계 보장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라는 점 △비시각장애인도 물리치료사 등의 자격을 취득해 안마사업 분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점 △일반인에게 안마사업을 허용해 경쟁이 이뤄지면 시각장애인 보호가 무의미해진다는 점 등을 든다.

위헌 논리도 만만찮다. 정부가 다른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너무나 손쉽게 독점권을 인정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보건소·복지시설에 시각장애인 산업안마사를 고용하게 하거나 △안마원에 시각장애인 고용 할당제를 실시하는 등의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방안을 마련하려 하지도 않고 독점권을 인정하는 것은 “사회보장·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국가의 의무(헌법 34조 2항)를 게을리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직업 선택의 자유’만을 무턱대고 옹호하는 의견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독점을 둘러싼 위헌 논란에 확실한 마침표가 찍혔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위헌 쪽도 복지시설 안마사 고용 등 대안 제시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인 이종수 연세대 교수(헌법)는 “‘직업 선택의 자유’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 시각장애인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합헌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장래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안마사를 독점하지 않아도 생존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심사위원 20자평
김진 이런 조처가 필요 없는 날이 더 간절하지만…
박근용 병 주고 약 줬지만 천만다행!
박영주 안마사 자격증 뒤에 숨은 복지국가의 허상
오창익 시각장애인 투쟁에 밀린 결정, 그래서 더 좋기도




김태규 기자 한겨레 편집2팀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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