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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올해의 판결] “성희롱 하려면 일자리 걸고하라”


여직원들을 성희롱하다 해고된 지점장, 6년 만에 대법원서 “해고는 정당하다” 판결
등록 2008-12-26 16:44 수정 2020-05-03 04:25

2003년 삼성카드 지점장 정아무개씨의 여직원 성희롱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지 6년. 판결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대법원까지 와 지난 7월10일에야 “지점장을 해고한 것은 정당하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끝은 아니다.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2심에 해당하는 재판을 다시 하도록 하는 것)돼 지난 12월12일 공판이 열렸지만, 정씨는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여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하며 싸움을 연장했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10여 명의 피해 여직원들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회사 쪽과 노동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증언한 뒤, 회사 동료들은 “괜히 회사 망신시킨다”며 눈을 흘겼고, 가해자 정씨는 여직원들을 찾아와 “뭐라고 진술했냐”며 압박했다. 갈수록 피해 여직원들은 위축됐다. 재판이 시작되자 모두 법정 진술을 꺼렸다. 결국 변호인 앞에조차 한 명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지금 회사에 남아 있는 이도, 연락이 닿는 이도 거의 없다.

“성희롱, 여성에 대한 일상적 차별이자 노동권 침해1” 2007년 6월18일 여성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서 여기자를 성추행한 최연희 의원에 대한 선고유예 판결을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성희롱, 여성에 대한 일상적 차별이자 노동권 침해1” 2007년 6월18일 여성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서 여기자를 성추행한 최연희 의원에 대한 선고유예 판결을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엉덩이 치고 뽀뽀하고… 고의성 없다?

정씨의 ‘손버릇’은 진작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1985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2000년부터 삼성카드에서 일했다. ○○지점 지점장으로 일하던 2003년 4월, 여직원을 지점장실로 불러 목과 어깨를 주무르게 하는가 하면 같은해 7월에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여직원을 뒤에서 껴안았다.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여직원의 엉덩이를 치고 지나가기도 하고 회식을 하면서 옆자리 여직원의 귀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성희롱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한 여직원을 식당으로 불러내 “네가 여자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여직원에겐 새벽 1시에 전화해 “오빠야, 내가 너 사랑하는지 알지. 넌 나 안 보고 싶냐”는 질문을 했다. 성과가 좋은 여직원에게는 “열심히 했어, 뽀뽀”라며 얼굴을 들이대고 회식 자리를 옮기는 중에도 계단에서 여직원을 껴안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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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한 직원들이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고 회사는 2003년 9월6일 정씨가 여직원들을 성희롱하고 조직력을 저해했다며 징계해고했다. 이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구제 결정과 회사 쪽의 2차 해고가 이어졌다. 노동위원회도 더이상 정씨의 구제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여직원들을 찾아갔다. 특히 나이가 가장 어리던 한 여직원의 경우 집까지 찾아가 “내가 널 그렇게 기분 나쁘게 했냐”고 따져물었다. 당황한 여직원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하자 정씨는 이를 녹취해 증거로 제출하며 소송을 냈다. 서울행정법원 4부(재판장 민중기, 배석판사 김정숙·이성호)는 “원고는 회사 쪽이 성희롱 피해 여성들과 접촉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이를 어겼고 1997년 삼성생명 영업소장 재직시나 2002년 삼성카드 다른 지점의 지점장으로 근무할 당시에도 성희롱으로 주의를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는 인사 규정이 정한 징계 사유에 해당하고 징계권자의 재량권 남용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 판결이 고등법원에서 뒤집혔다. 2007년 10월10일 서울고등법원 5특별부(재판장 조용호, 배석판사 유승룡·박우종)는 “정씨에 대한 2차 해고가 징계권 남용에 해당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여직원들에게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했으므로 성희롱은 맞다면서도 “원고의 행동이 성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격려 의도, 혹은 성과에 대한 과도한 흥분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단서를 붙였다. 따라서 “원고의 행동은 왜곡된 사회적 인습이나 직장 문화로 인해 형성된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해직 요건인 ‘고의성이 현저한 경우’로 보기 어렵다”는 논리다. 유승룡 판사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판결은 ‘해고’는 과하다는 취지였다”고 밝혔다.

조사·재판 과정서 위축된 피해자들

판결에 충격을 받은 변호사들은 이 사건에 목소리를 함께 내줄 시민단체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류혜정 변호사는 “굵직한 시민단체의 남자 선배들조차 ‘삼성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에 함께 나설 수 없다’며 성희롱 문제를 신경쓰지 않아 놀랐다”고 말했다. 사건은 그렇게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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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0일 대법원(주심 안대희)은 “원고의 해고를 징계권 남용이라고 판단한 것은 성희롱 행위자에 대한 징계해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며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직장 내 성희롱을 방지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가 성희롱을 할 경우 그 피해자가 고용상의 불이익이 두려워 성희롱을 감내할 가능성이 크기에 더욱 엄격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원심 판결과 달리 정씨의 행위를 ‘고의성이 현저하다’고 판단했다.

1심부터 사건을 함께 담당해온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김성수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오랜 조직문화 관행상 ‘격려의 의미’ 혹은 ‘작은 실수’로 치부하던 성희롱을 더 이상 사회가 용인하지 않겠다는 첫 선언”이라며 “이제 성희롱하려면 일자리를 걸고 하라며 경종을 울인 셈”이라고 말했다.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지만, 사건 관련자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지난 6년간 피해자들은 모두 몸을 움츠려야 했고 가해자는 해고됐으며 해고를 한 회사도 “더 이상 회사 이름이 언급되지 않길 바란다”며 인터뷰를 피했다. 사건의 최종 판결은 또 해를 넘기게 됐고 정씨는 집까지 찾아가 녹취를 했던 여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여직원은 이미 주소를 바꿔 출석요구서 송달도 안 된 상태다. 여성 부문 ‘올해의 판결’로 선정된 이번 사건의 파기환송심은 2009년 2월27일 오후 2시에 다시 열린다.


류혜정 변호사 인터뷰
“여직원들 계속된 피해 안타까워”


류혜정 변호사

류혜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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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성희롱 피해자들이 지난 6년간 계속해서 2차, 3차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죠.”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류혜정 변호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성희롱 가해자인 지점장이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중앙노동위원회와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회사 쪽 변론을 맡아왔다.

-재판이 길어졌다. 어려웠던 점은.
피해자들이 조사 과정에서 하도 시달려 재판이 시작되고는 변호인도 만나주지 않았다. 회사나 노동위원회 쪽에 진술하는 과정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가해자는 “내가 회사에 얼마나 헌신했는 줄 아냐”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말하고 피해자들은 숨는 식이었다. 아마 (회사가 아닌) 성희롱 피해자들이 감당해야 할 소송이었다면 끝까지 가기 어려웠을 거다.
-지점장이 한 성희롱의 수위가 매우 높다.
성희롱 사건이라고 하지만 사실 내용을 보면 성추행 수준이다. 피해자들이 형사 고소,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에 나설 경우 승산이 있다. 이미 판결을 통해 성희롱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대리소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피해자들 없이는 소송을 할 수 없다. 만약 피해자가 표현을 잘 못하는 장애인이고 보호자가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성범죄에는 대리소송을 허용해야 한다.
-성희롱 문제와 ‘노동자 해고’ 문제가 겹쳤다.
그 부분 때문에 시민사회단체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직에서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가 일어날 경우 해고는 사용자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인식이 자리잡길 바란다.



■ 심사위원 20자평
김진 별 뜻 없다는 핑계는 이제 안 통한다
박영주 ‘세상의 반’의 분노를 조금은 위로할 수 있을까

이종수 해고가 지나치다는 고법 판결이라니

최강욱 이 당연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여성들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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