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 데는 출산의 공포도 한몫했다. 거기, 그 좁은 곳을 찢고 커다란 아기가 나온다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어찌어찌하다 임신까지는 하게 됐으나 미처 출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진짜 내가 아기를 낳는다고? 오 마이 갓,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출산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산전후휴가에 돌입했다. 그때부터 폭풍 검색을 통해 다른 이들의 출산 후기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각종 블로그와 카페에 임산부들이 올려놓은 글은 나를 더욱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관장, 면도, 회음부 절개는 ‘굴욕 3종 세트’, 아이를 낳기 직전의 느낌은 ‘똥꼬에 수박이 낀 기분’…. 언어의 연금술사들이 따로 없었다.
출산 예정일 3주 전, 산부인과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아기가 벌써 3.8kg이네요. 너무 커서 이대로 예정일까지 두면 4kg을 넘겠어요. 다음주에 유도분만 날짜를 잡읍시다.” 아악,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벌써 낳자니요. 게다가 촉진제를 주사해 강제로 진통을 유도하는 유도분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지라 의사에게 사정했다. “그냥 기다려보면 안 될까요? 진통이 올 때 자연분만 하고 싶어요.”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다가 4kg 넘으면 저도 모릅니다.”
정확히 열흘 뒤 일요일, 진통이 시작됐다. 일요일 하루를 불규칙한 진통 간격을 재느라 소진해버리고 그래도 불안해 월요일에 남편의 출근을 막았다. 혼자 견디기엔 너무도 무서워서였다. 그 와중에 힘을 잘 주려고 친정 엄마표 소갈비까지 잔뜩 먹었다. 먹으면서도 무서웠다. 월요일마저 불규칙한 진통으로 보내버려 남편의 눈치가 보이던 찰나, 헉 소리 나게 진통의 강도가 세졌다.
밤 11시, 이제는 진짜 진통이라며 남편의 손을 잡고 집 앞 산부인과를 찾았다. 손가락으로 자궁의 열린 정도를 측정하는 ‘공포의 내진’을 마친 간호사는 “자궁이 이제 겨우 1cm 열렸으니 집이 가까우면 집에 갔다가 진통이 더 심해지면 다시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새벽 4시30분까지 벽을 치며 진통을 참았다. 숨 쉬기도 힘들 즈음 다시 병원으로 갔다.
“어머! 벌써 6cm나 열렸네요. 너무 많이 진행돼서 무통 주사도 못 놓겠어요.” 아까 그 간호사가 놀라며 말했다. 이런 십장생, 무식하게 너무 오래 참았구나. 후회로 가슴을 쳤지만 별수 없었다. 이제는 힘을 줄 시간이다.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싶은 순간에 조금만 더 참고 힘을 주면 아기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나는 말 그대로 성실하게 힘을 줬다. “더더더더더…”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힘을 정말 잘 주시네요.”
아침 8시42분, 의사가 들어온 지 5분 만에 순풍, 미끄덩 하더니 아기가 나왔다. 3.9kg, 51cm의 우량한 아기였다. 병원에 도착한 지 4시간 만이었다. 분만 과정을 지켜본 남편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정말 FM으로 애를 낳았어!” 그사이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다가 내 배 위에 올려주었다. 나왔구나. 네가 곤란이구나. 곤란아, 안녕. 진짜 아팠지만 해냈다. 출산, 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알고 보니 나는 순풍녀였다.
임지선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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