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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파리채

등록 2008-07-17 00:00 수정 2020-05-03 04:25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C가 파리채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어느 평화롭던 일요일 오후였다. 빌라 베란다로 나선 C는 깜짝 놀랐다. 베란다 한쪽에 참새만 한 말벌 한 마리가 ‘붕붕’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크기의 말벌을 향해 미친 듯이 모기약을 뿌려댄 C는 문득 깨달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살충제를 반 통 정도 흡입하면 사람도 죽을 수 있겠구나!’

살충제 사건 이후 C는 파리채 전문가로 거듭났다. C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파리채 시장은 최근까지 무동력 파리채와 전기파리채(전기채)의 치열한 2파전이었다. 무동력 파리채가 정지 상태의 파리를 잡는 데 유용하다면, 전기채는 비행 중인 목표물도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 가격은 최저가를 기준으로 무동력 파리채가 500원 선, 전기채가 3천원 선이다. 전기채의 경우 배터리 포함 가격이다. 업체에 따라 단돈 5천원에 전기채 두 개를 제공하는 ‘1+1’ 행사를 펼치기도 한다.

C는 노란색 무동력 파리채를 골랐다. 이 파리채는 목표물을 향해 내리치면 허리가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며 ‘찰싹’ 경쾌한 타격음을 낸다. 기분에 따라 적절한 강약 조절을 통해 감정을 실을 수도 있다. 목 부분에 박힌 두 글자 ‘정품’이 오리지널의 자존심을 과시하는 대목이라면, 안정감을 더한 인체공학적 손잡이는 만든 이의 장인정신을 엿보게 해준다.

C의 선택과 달리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쪽은 후발주자인 전기채다. 관련 통계가 없어서 정확한 분석은 어렵지만, 값싼 중국산이 가세하면서 시장의 주도권은 전기채 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무동력 파리채 업계에서는 이태리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고 브랜드 파리채를 내놓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무동력 파리채 전문가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각종 자료를 종합하면, 1983년 곽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가 함께 특허출원한 ’이불털이개 겸용 파리채’를 시작으로 파리채에 대한 연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2002년 신아무개씨는 끈끈이판이 부착된 양면 파리채 개발을 시도했다. 같은 해 류아무개씨는 파리채의 망체판 곳곳에 소형 돌기물을 장착한 파리채를 내놓았다. 타격시 파리의 몸통이 터지지 않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이것마저도 비위생적이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한 백아무개씨는 이에 앞선 1996년 파리채와 잠자리채의 장점을 겸비한 ‘타·포 양용 파리채’를 개발한 바 있다. 1999년에는 접이식 위생 파리채 상용화가 시도됐고, 2003년에는 살충제 분사 기능을 갖춘 파리채, 2006년 발광 파리채가 각각 빛을 볼 ‘뻔했다’. 물론 죄다 실패했다. 파리채가 파리채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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