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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싸움

등록 2008-11-13 17:02 수정 2020-05-03 04:25
시간 싸움

시간 싸움

런던에서 가장 힘겨운 것 중 하나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뒤늦게 찾아온 ‘열공’ 모드로 인해 책 읽고 고뇌하느라 바빠서? 한국에서 나를 찾는 수많은 친구와 직장 동료들과 시차가 맞지 않아서? 아니다. 적당히 한가하고 적당히 외로운 유학생인 내가 여기서 싸우고 있는 ‘시간’이란, 내 기준의 시간과 이곳 기준의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그 무한정의 시간을 뜻한다.

커다란 바가지에 물을 받아야 하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똑똑’ 떨어질 때의 그 갑갑한 심정으로 매번 컴퓨터 앞에 앉는다. 걸어만 놓으면 1~2GB 크기의 파일도 몇 분 안에 거뜬히 받아내는 ‘다운로드의 천국’은 이곳에 없다. 700MB 크기의 파일을 1시간 걸려 받다 보니 다운로드 속도에 따라 하루 기분이 달라지기도 한다.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도 힘겹다. 10월 중순에 신형 맥북 출시에 눈이 멀어 잠시 이성과 판단력이 가출을 했던 적이 있다. 날뛰는 환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 할인을 받는 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설득해가며 신형 맥북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러나 배달 예상 날짜가 지나도 맥북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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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배달 기사들은 한국과 다르다. 물건이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주지도 않고, 문자를 보내주지도 않는다. 잠깐 어디 다녀온 사이에 배달 기사가 다녀가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집 현관 초인종이 고장나서 ‘벨이 울리지 않으니 오면 꼭 전화를 해달라’며 휴대전화 번호까지 초인종 옆에 큼지막하게 써놓았다. 그러나 배달 기사는 예상 날짜에서 사흘이 지난 다음 ‘집에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메시지만 남겨놓고 유유히 돌아갔다. 그렇게 기다리던 맥북이 집 앞 현관까지 왔다가 갔다는 사실을 알고, 심지어 그 시간에 집에 있었는데 전화 한 통도 없이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 저녁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림의 달인’ 초고속 김병만 선생님의 한 말씀. “영국 은행에서 계좌 열어봤어요? 안 열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은행에 비하면 다운로드나 택배쯤은 귀염둥이다. 나는 운이 좋아 한국에서 영국 은행 계좌를 절반쯤 열고 가서 쉽게 은행 문제를 해결했지만 같은 과에 다니는 한 친구는 계좌를 여는 데만 몇 주가, 직불카드를 받는 데 일주일 이상이, 비밀번호를 받는 데 며칠이 걸렸다. 은행에 가면 바로 계좌를 열고 그 자리에서 비밀번호를 등록해 직불카드를 받는 ‘원데이’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는, 한 달하고도 반이 넘게 걸리는 영국의 은행 시스템 앞에서 ‘기다림의 끝’을 맛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 친구가 계좌를 ‘완전하게’ 연 날, 나는 진심으로 친구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언제쯤 이런 기다림의 시간에 익숙해질까. 언제쯤이면 평균 100KB/s인 다운로드 속도를 당연하다는 듯 바라볼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배달하러 왔다가 ‘다음 배달 약속’ 쪽지만 놓고 돌아가는 배달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 몸에 배어 있는 시계는 시침과 초침을 돌려 맞추면 그만인 손목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도를 닦으며 깨닫는 중이다.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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