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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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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화 단계

등록 2008-10-31 14:58 수정 2020-05-03 04:25

“대중적 저널리즘과 사회학적·문화연구적 분석은 어떻게 다를까?”
‘소통으로서의 음악’(Music as Communication)이라는 수업의 세미나에서 교수에게 들은 첫 번째 질문이다. 이 수업은 제목 그대로 음악에 관한 수업이다. 첫 수업에서 밥 말리의 를 7개의 다른 버전으로 들었다. 게다가 섹스 피스톨스부터 듀크 엘링턴까지 매 수업마다 적어도 8곡 이상의 음악을 듣는다. 수업에 이어지는 세미나에서는 학생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선곡해 같이 듣는 시간도 있다. 이 수업을 선택한 이유는 음악을 좋아해서기도 하고, 실제적인 수업을 듣고 싶어서였다. 음악이라면 뜬구름을 열심히 잡아내는 이론가의 지루한 수업이 아닐 것 같은 기대감도 있었고, 한국에서 종종 하던 대로 음악에 대해 뭔가를 써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이 질문과 함께 막연한 기대는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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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에서 한 친구가 음악을 틀었다. 일렉트로닉 음악과 아프리카 리듬이 뒤섞인 몽롱한 음악이었다. 교수는 이 음악을 듣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냐고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이 음악은 어떤 느낌이며, 어느 장르로 추정되며, 어떤 뮤지션의 음악과 비슷하며, 좋다 혹은 별로다’ 등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답은 지양해야 하는 저널리즘식의 답변일 뿐이다.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은 뭐든 학문적 고리와 연결시켜 생각을 이어가는, 마침표를 찍기보다는 물음표를 던지며 더 깊은 곳을 향해 삽질이라도 좋으니 어디든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취향이나 경험이 이 수업을 더 수월하게 해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다.

엄청난 속도의 계산기 대신 연필과 지우개를 손에 든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느껴지는 데는 대학 학부 시절이 한몫한다. 나는 말 그대로 학교를 그냥 ‘다녔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얘기하는 누구의 대단한 이론보다 학교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작은 일이, 또 캠퍼스 밖 세상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현실적인 무언가가 늘 내 관심사였다. 그렇게 대학 신문사에서 시작한 ‘기자질’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강의실이 지루하다고 느꼈던 스무 살 때 맹꽁이 같은 이분법이 생겨났다. ‘학문은 지루하고, 신문은 재미있다’ ‘실제는 이론에 우선한다’ 등. 기사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렌드 기사나 문화 기사의 마지막에 따라붙는 어디 교수의 코멘트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결심 아닌 결심을 했던 게 몇 번이던가.

그랬던 내가 학문적 글쓰기와 연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익숙한 세상과의 이별이며 낯선 세상과의 첫 만남이다. 그렇다고 마냥 이별한 세상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아쉬워할 수는 없기에, 낯선 세상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학부 시절에도 찾지 않던 도서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고등학교 때 작별한 형광펜과 다시 만나고, 건전지가 닳도록 전자사전을 뒤지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은 일종의 사막화 단계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상태, 완전한 미완성의 상태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익숙치 않은 순간이 흥미롭다. 나는, 아마도 이 낯섦을 찾으러 이 먼 곳까지 온 건 아닐까.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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