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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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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대 커플

등록 2008-11-21 19:04 수정 2020-05-03 04:25
<개그콘서트>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

<개그콘서트>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

몇년 전 어느 날, 고시 준비하느라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평생 여자친구도 못 사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사촌 오빠에게 나는 짧은 위로의 말을 던졌다. “남잔 키가 크거나 웃기면 인기 있게 돼 있어.” 예나 지금이나 연애 문제는 10점 만점에 1점인 주제에 뭘 믿고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이다. 여자들은 키 크고 잘생긴 남자만큼, 혹은 그보다 더 웃긴 남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한국방송 에서 이상형을 한 명 고르는 것은 의 ‘F4’ 가운데 한 명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나폴레옹과 베토벤에 이어 작은 거인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달인’ 김병만, 막무가내 독설로 좌중을 장악하는 ‘박대박’의 박영진, 태연한 표정으로 자뻑의 극단을 보여주는 ‘닥터피쉬’의 유세윤. 그런데 이 화려한 면면들을 제치고 내 주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는 단연 황현희다.

정치 자체가 코미디에 가까운 우리나라에서 시사 풍자의 소재는 무궁무진하게 쏟아져나오지만 잘 만든 시사 코미디는 의외로 드물다. 권력도 자본에서 나오는 사회가 되어서겠지만 ‘범죄의 재구성’의 황 검사와 ‘집중토론’의 진행자로 잔뼈가 굵은 황현희는 여전히 “너 저번에 화장품 15만원어치 샀는데 샘플 하나도 못 받았지? 그거 누가 그랬을까? 누가 그랬을까?”라며 ‘회장님’의 권위 뒤에 숨은 치졸함을 한껏 까발리고(‘많이 컸네 황회장’), 일개 방송사 PD 주제에 소비자의 편에 서서 “오늘 하나만 걸려봐!”라며 ‘사장님’을 윽박지른다(‘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 “밀가루값은 떨어지고 있는데 라면값은 안 떨어지고, 국제유가는 떨어지는데 기름값은 떨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그는 “왜 출산율은 떨어지는데 숙박비는 떨어지지 않고, 시력은 떨어지는데 안경값은 떨어지지 않냐”고 비튼다. 그리고 사실 이런 말장난은 “살기 힘듭니다. 물가 좀 내려주세요. 국민들의 목소리가 안 들립니까?”나 “우기지 마세요. 독도는 우리 땅” 같은 진짜 ‘말’을 하기 위한 장치다.

그 황현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시사 코미디의 원조 격이었던 고 김형곤을 가장 존경해 아직도 그가 남긴 개그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한다는 황현희는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개그에 시사가 없어지고 있어요. 예전에는 억압 때문이었다지만 요즘에는 공간이 없어요. TV를 보는 사람들이 메시지보다는 웃긴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말에 뼈가 있는 개그는 점점 없어지는 거죠.” 개그를 위해 하루 다섯 가지 신문을 읽는다는 그에게서는 꽃미남도 스포츠맨도 아니지만 어딘가 후배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과대 학생회장 ‘오빠’의 향기가 났다.

요즘 에 안대를 하고 출연하는 황현희를 보며 괜히 반가워한 것도 사실은 그 부질없는 팬심 때문이다. 황현희는 겨울 외투를 꺼내다가 옷걸이에 맞아 눈 주위에 골절상을 입었고 나는 지하철에서 부랑자에게 맞아 한쪽 눈이 팬더가 된 것인데, 커플 티나 커플 잠옷보다 더 희소성 있는 커플 안대라는 데 의미를 두어본달까. 그나저나 황현희 PD님, 제 눈도 두 개인데 안대는 하나밖에 안 들어 있어요. ‘소비자 고발’ 뒤에도 시정하지 않은 악덕 기업, 이대로 두실 건가요?

최지은 기자 10-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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