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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악을 척결하라

부글부글
등록 2012-02-01 11:13 수정 2020-05-03 04:26
해설자로 변신하는 농구 스타 출신 현주엽.

해설자로 변신하는 농구 스타 출신 현주엽.

‘거악을 척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검사들이 많이 쓰는 관용어구입죠. 배임, 횡령, 부패, 비리…. 나라를 망치는 거악들입니다. 역으로 이런 거악들을 척결하면 나라를 살린다는 뜻도 되겠지요. 대한민국을 살리는 거악척결대 검찰 만세! 그러나 2012년은 흑룡의 해라는데, 정작 용띠인 섬아저씨 기자는 거악보다 하루하루 ‘소악’에 분노합니다. 가령 1월20일 전자우편으로 날아온 제 월급명세서를 보고 좌심실이 부글부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밤, 끓는 물에 라면을 넣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그날따라 텅 빈 달걀통을 보며 우심방이 부글부글. 세상이 나를 우습게 여기는 느낌. 니미럴.

섬아저씨 오늘 또 분노합니다. 한국프로농구연맹(KBL)이 1월26일 ‘15주년 레전드 올스타전’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올드스쿨 농구팬이라면 아마 가슴이 아련해질 이름들이, 명단에 빼곡합니다. 이상민 선수야 말이 필요 없죠. 거물급 포인트가드 ‘6년 주기설’의 고리 아니겠습니까? 1966년생 강동희, 1972년생 이상민, 1978년생 김승현으로 이어지는 6년 주기설은 콘드라티예프 파동보다 더 믿을 만했죠. 정재근의 이름도 보입니다. 상무 시절이던 1993∼94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신예 서장훈을 상대로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꽂던 장면은, 아직도 섬아저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정작 최다 득표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듯합니다. 레전드 올스타전 드림팀 최다 득표자인 현주엽과 매직팀 홍사붕은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고 KBL은 밝혔습니다. 이유는 “개인 사정”이라는군요. 썰렁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의 아무개 기자라면 “그래, 올스타전보다는 건강한 성생활이 중요하지”라고 말했겠지요. 그러나 섬아저씨는 그런 언어유희를 즐기기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현주엽씨는 선수 생활을 접은 뒤 사기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잠시 기사를 봅시다. “최근 국가대표 출신 농구선수 현주엽씨를 상대로 거액의 투자 사기를 친 선물회사 직원이 실형을 선고받은 가운데 현씨가 해당사를 상대로 ‘투자 손실금 17억원을 배상하라’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1년 8월21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대기업 계열 S선물 직원 이모씨에게 속아 24억원을 투자했다가 17억원을 잃은 현씨는 S선물을 상대로 지난 3월 손해배상 조정신청을 냈다.” 17억원이라면 현주엽씨가 선수 시절에 모은 돈의 대부분일 겁니다. 사기범 녀석 때문에 섬아저씨는 ‘매직 히포’ 현주엽의 덩크를 간만에 감상할 기회를 잃습니다. 아, 우심방 부글부글.

시인 김수영을 들먹거리며 ‘왜 섬아저씨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고 갈구지 마세요. 정의롭고 머리마저 좋은 검사만이 할 수 있는 거악 척결보다 어찌 보면 소악 척결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거악은 가끔 벌어지고, 언론이 주목하고, 능력 있다는 검사들이 매달려 싸우지만, 소악은 필부필부들의 일상에서 늘 벌어지고, 언론의 펜과 카메라도 비추지 않고, 오로지 양심 있는 공무원, 미국 유학을 다녀오지는 않았지만 원칙을 소중히 생각하는 기업 직원, 상식을 지키는 형사부 검사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올해 저는 소악에만 부글거리렵니다. 소악은 거악의 바로미터라는 거. 현주엽을 보여달라!(그럼 현주엽을 못 보는 게 LMB 때문이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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