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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당한 여러 개의 문

벤 샨, <해방>
등록 2012-07-14 14:06 수정 2020-05-03 04:26
www.mo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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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혹시 매달려 있는 것 아닌가. 놀이기구가 아니라 버려진 붉은 기둥에 결박당한 채 풀려나려고 애쓰는 건 아닐까. 미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 벤 샨(1898~1969)의 그림 (Liberation·1945)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시원한 그림이다. 주변 공기가 아찔해질 때까지 놀이기구 하나에 매달려 빙빙 지칠 줄 모르고 노는 아이들의 표정은 서늘하다. 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알리는 뉴스를 본 순간의 환희를 그린 그림이다.

절망에서 갓 건져낸 환희는 환희라고 하기엔 여전히 위태로운 상황이다. 화면 각도는 전반적으로 기울어 있고, 폭격당해 벗겨진 건물이 덩그러니 있다. 바닥에는 폭탄으로 바스러진 자갈이 쌓여 있다. 그럼에도 해방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던 건 있는 힘껏 날아오르는 꼬마들의 다리와 바람에 날리는 색색의 옷자락 때문이다. 폭격당한 건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색깔의 문이 환하다. 다이아몬드 문양의 노란색 벽지와 꽃무늬 벽지는 하나씩 떼어서 보면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제정 러시아 시절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벤 샨은 1906년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로 이주했다. 젊은 시절 석판화공의 도제로 일하며 야간 중학교에 다녔고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는 삽화나 벽화 제작, 정부사업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만들며 경제공황 이후의 미국 현실을 지켜봤다. 1935년부터 3년 동안은 사진가 워커 에번스와 함께 미국 농업안정국에 소속돼 수많은 노동자를 만났고, ‘드레퓌스 사건’ 등 정치적 사건을 주로 그리며 세계의 치부를 고발했다.

벤 샨의 작품 중에서 은 자신의 개인적 기억을 겹쳐놓은 드문 그림이다. 주로 광부나 공사 현장의 노동자, 뉴스 속 인물을 그린 작가는 이 그림에서 뉴욕의 뒷골목 공터에 홀로 앉아 있는 어린 꼬마를 불러냈다. 의 배경은 막막하고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린 또 다른 그림 의 자갈밭과 닮았다. 벤 샨은 “재난을 둘러싸고 있는 정서적인 색조를 찾고 싶었다”며, 이를 ‘정서적 재난’이라 불렀다. 사적인 재난의 감정과 공적인 폭력이 속에는 함께 있다. 아이들의 웃는 듯 찡그린 얼굴과 전쟁이 끝나가는 날의 공터. 어린이는 폐허이자 놀이터인 곳에서 비정상적인 동작으로 하늘을 난다.

이 떠오른 것은 영화 을 보고 나서였다. 의 폭격당한 건물의 파스텔톤 문과 이 기록해낸 화염으로 가득한 문의 이미지는 서로 포개지고 미끄러진다.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일까.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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