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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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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조공’이 케이팝 문화? 그 문화의 문제적 지점

‘내 아이돌’ 자랑하며 팬덤 간 왜곡된 경쟁 낳기도…여전히 많은 팬은 ‘있는 그대로’ 지지해
등록 2025-01-10 18:04 수정 2025-01-15 16:31
2022년 3월10일 방탄소년단 공연이 열리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주변에 줄 선 팬들. 연합뉴스

2022년 3월10일 방탄소년단 공연이 열리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주변에 줄 선 팬들. 연합뉴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국가애도기간이 지정되면서 2024년 문화방송(MBC) ‘가요대제전’이 생중계 대신 전면 녹화로 진행됐다. 이 행사에서 때아닌 아이돌 ‘역(逆)조공’(연예인이 팬들에게 제공하는 선물) 논란이 일었다. 2024년 12월29일, ‘가요대제전’ 출연 아티스트들 무대의 사녹(사전 녹화)이 이뤄졌는데, 다음날 출연팀 대부분이 제공한 역조공 리스트가 엑스(X, 옛 트위터)에 올라온 것이다. 사녹에 참여한 팬들에게 배부된 역조공 구성품은 저마다 달랐는데, 아티스트 포토카드 같은 굿즈를 포함해 핫팩, 붕어빵, 어묵차 등 따뜻한 먹거리 및 방한용품들이 두루 보였다.

연말 시상식 사녹은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악명 높다. 수십 팀의 무대가 현장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진행되는데, 앞 팀 녹화 지연이 이후 팀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요대제전’ 사녹이 열린 일산 MBC 드림센터에는 별도의 대기 장소가 없었고, 팬들은 야외 혹은 건물 로비 바닥에 앉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날 서울의 최저 온도는 영하 4도였다.

불똥은 그날 역조공을 하지 않은 팀인 에스파와 데이식스를 향해 튀었다. 어떤 아이돌의 역조공을 하지 않기로 한 선택은 팬들이 감당한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논리였다. 추운 날씨에 자신을 응원하러 온 팬들의 손에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은 채로 집에 돌려보내는 건 배려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팬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조공이 이뤄지듯 역조공의 의무를 아이돌에게 지우는 건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한 팬이 “이제는 역조공이 팬뿐만 아니라 그룹 이미지까지 걸린 케이팝의 문화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논란은 거세졌다.

문화로 자리잡은 역조공은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적이다. 먼저, 한 번 역조공을 한 아이돌은 이를 지속해야만 팬을 안심시킬 수 있다. 이는 이번에 역조공을 하지 않아 논란이 됐던 에스파가 과거에는 ‘역조공을 잘하는 팀’ 이미지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자신의 인기와 성장에 기여한 팬들을 향해 역조공으로 보상하는 아이돌은 기특하다. 그러나, 역조공을 했다가 하지 않는 아이돌은 어느 순간 초심이 변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두 번째로, 역조공은 팬덤 간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어떤 팬은 역조공 인증 행위를 통해 다른 팬덤 사이에서 막연한 우월감을 느낀다. 아이돌 멤버가 손수 구운 쿠키나 친필 편지로 꾸려진 역조공 물품에는 ‘최수종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내 아이돌이 바쁜 일정을 쪼개 팬들을 위한 선물을 마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세심한 인성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별도의 ‘캐릭터 빌딩’이 필요 없어질 만큼 말이다. 역조공 구성품에 아이돌이 광고 모델로 계약한 제품이 들어 있으면 내 아이돌의 시장가치를 힘껏 자랑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조공 클래스’라는 제목의 온라인 게시물은 팬덤이 경신해야 할 목표점이 된다. 내 아이돌을 부추겨서라도 다음번에는 더 나은 선물을 더 자주 받아내야 하는 식으로.

문화비평가 루이스 하이드는 ‘선물’의 기본적인 속성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든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선물을 살 수 없다. 선물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선사되는 것이다”. 역조공이 아이돌의 필수 덕목 중 하나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팬을 향한 선물로서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다. 선물의 수신인만이 선물의 진짜 가치를 결정하는 구조는 어딘가 뒤틀려 있다. 잊지 말자. 여전히 많은 팬은 아이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진짜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걸.

서해인 콘텐츠로그 발행인

*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케이팝을 듣습니다. 케이팝이 만들어낼 ‘더 나은 세계’를 제안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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