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가 공포심을 갖거나 혐오하는 국가나 인종은 주로 이웃인 경우가 많다. 아마 북한·한국·중국·러시아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위를 다툴 것이다. 이웃해 있어 서로 접촉할 기회가 많으니 이해의 폭이 넓어져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인 경우가 많아 때로는 험악한 말이 오가기도 한다. 정부 간 관계와 민간 교류가 다르니 외교적 마찰이 개별적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정부 간 관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양자를 구분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낳은 영토 분쟁
거리가 가까운 만큼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쉬운 게 그 까닭일 것이다. 최근 동북아시아에서 영토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소 거리를 두고 이 문제를 바라보면 영토 분쟁은 그저 국가 에고가 충돌하는 현상만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중국·대만, 러시아에 대해 일본이 자국 영토라 주장하는 독도, 센카쿠(댜오위다오), 쿠릴열도 4개 섬은 모두 19세기 이래 일본 제국주의의 대외팽창사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연재물에서 자세하게 다룬 바 있으니(874호 ‘센카쿠인가, 댜오위다오인가’) 이 자리에서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하지만 씨앗을 뿌린 게 일본이라는 사실은 지적해둬야 한다. 따라서 영토 갈등은 지금의 일본이 제국주의 역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물론 제국주의는 서구 사회가 원조이니 이를 뼛속까지 흉내 낸 일본만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서구는 주로 원격지 제국주의인 데 반해 일본은 인접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인접 국가와의 분쟁을 증폭시킨 점이 있다. 따라서 영토 갈등은 기본적으로 일본이 과거 전쟁과 침략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인 셈이다.
사실 근대 이후 아시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쟁에서 일본은 항상 당사자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에서 항상 일본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그것도 대개 기습공격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오키나와를 예외로 하면 지금 일본 영토라 불리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중국이 주된 무대였고, 만주침략이나 중일전쟁은 중국이 무대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주 무대는 동남아시아였다. 이렇게 보면 국가로서는 일본 사회가 이웃 국가나 인종에 피해를 입힌 적은 있어도 국가 차원에서 피해를 입은 적은 없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일본 일각에서 이들 인접국가가 일본 사회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소리가 나온다는 점이다. 이런 소리들이 영토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에 공포심을 갖는 것은 객관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적어도 역사적 기억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일본 사회가 한반도나 중국이 일본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를 가진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한다’는 말처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공포가 이웃 국가에 대한 공격 심리로 나타났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전위적 공격행동(Displaced Aggression)이다. 혹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일본이 가졌던 팽창주의 욕구를 이웃 국가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이웃 국가들에 대한 공포를 낳았고 이것이 이웃 국가에 대한 혐오감으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허구적 일치성 효과(False Consensus Effect)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과거에는 술자리 등과 같은 사석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던 차별적인 언설들이 최근 공적인 언설로 등장해 이웃나라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과대하게 포장해 유포하는 언설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웃 국가들의 일본 침략 가능성을 반복 주장해 혐오감과 공포심을 선동하고 일본인의 대동단결을 환기하는 것은 공포가 커뮤니케이션의 설득력을 높인다는 광고이론의 ‘위협소구’(Fear Appeal)에 비견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련·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유난한 이유
그런데 이 중에서도 특히 일본 사회가 옛 소련이나 러시아에 지닌 공포와 혐오감은 유럽 사회 이상이어서 유별나다. 왜 그럴까? 물론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청일전쟁 뒤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획득한 랴오둥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압력으로 되돌려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당시 러시아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뜻으로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하니 적대감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적대감이 이후 러일전쟁의 불쏘시개가 된 사실은 잘 알져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삼국 중에서 왜 러시아에 대해서만 적대적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삼국간섭 당시 반러 감정이 있었다 해도, 중국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동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이를 가지고 일본 사회가 억울하게 느껴야 할 까닭은 없다.
지금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는 홋카이도 북단에 있는 쿠릴열도 4개 섬 문제를 그 원인으로 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홋카이도와 쿠릴열도는 원래 아이누 사람들의 땅이었고 19세기 이래 러시아와 일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점령을 반복해온 곳이니 아이누 사람들이 억울하게 느낄 수는 있어도 일본 사람 전체가 러시아에 적대감을 가질 까닭이 되지는 못한다. 일본의 반러 감정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문제는 역시 시베리아 억류 문제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중국 동북부와 내몽골 지역 등에서 약 60만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이 중 약 10%가 사망했다 하니 러시아에 대한 분노가 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가 주연한 영화 에 삽화처럼 등장하는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기 전인 1945년 8월9일 소련 쪽이 중립조약을 어기고 기습적 군사행동을 감행해 피해를 키웠으니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소련의 행위도 괘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경험을 재생산하고 증폭시킨 각종 수기나 신화 같은 것들이 더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대체로 수기나 신화에서 러시아 병사는 절도·성폭행을 서슴지 않는 인간 이하의 ‘말종’이고 일본인은 이에 대항할 힘이 없는 일방적인 피해자로 그려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말할 수 없는 ‘9명의 소녀’의 진실
홋카이도 최북단. 인구 4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 왓카나이에 있는 왓카나이 공원에 가면 ‘9명의 소녀상’(九人の乙女の像)이 있다. 1963년에 건립된 시설이다. 1968년에는 당시 천황 히로히토가 방문해 명성을 얻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45년) 8월20일 소련군이 가라후토의 마오카에 상륙을 개시했다. 그때 갑자기 일본군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마오카 마을. 그런 가운데 (전화) 교환대에 있던 9명의 소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직장을 지켰다. 창밖으로 폭탄이 작렬하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 속에서 교환대에 앉아 ‘여러분 마지막입니다. 사요나라(안녕), 사요나라’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청산가리를 마셔 꿈 많은 꽃 같은 젊은 목숨을 끊고 순직했다.” 가라후토는 사할린의 일본명이고 마오카는 홀름스크의 일본명이다. 이 비문 내용대로라면 9명의 소녀 교환수들이 철수 명령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지키다 소련군의 ‘능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남성=가해자’에 대해 ‘일본인=여성=피해자’라는 구도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왜 철수하지 않았을까? 철수하지 않고 죽음을 택할 정도로 전화교환수의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왜 죽은 사람은 모두 여성일까? 청산가리는 어떻게 구했을까? 사실 이 비문은 고친 것이다. 원래의 비문은 “일본군의 엄명을 받은 마오카 전화국에 근무하는 9명의 소녀들은 청산가리를 건네받고 마지막 교환대로 향했다. 소련군 상륙과 동시에 일본군이 명하는 대로 청산가리를 마셨다”고 돼 있었다. ‘일본군의 명령’이라는 부분이 없어진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의 명령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민간인에 대한 철수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이들은 철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이 상황이 일본군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비문 등에는 집단 자살에 참여하지 않은 전화교환수 3명의 생존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자살을 택하지 않은 생존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운 행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오키나와나 사이판의 집단 자살에서 표상되는 방식이 여기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져 미화
이들 9명은 공무 중 순직으로 1973년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1974년에는 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소련의 은 이 영화를 “소련 국민과 소련군을 중상모략하는 반소 영화”라고 비난했다. 또 2008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제작돼 큰 반향을 얻었다. 하지만 9명은 분명히 억울하게 죽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져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죽음을 일본인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순결’을 지키기 위한 옥쇄나 산화로 포장하고 생존자를 ‘부끄러움’으로 내모는 역사를 만들고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키움으로써 일본이라는 국가는 이 책임에서 벗어났다. 이런 일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1960년대 이후에 일어났다. 일본 작가 오다 마코토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을 옥쇄나 산화로 포장하는 국가권력에 대해 전쟁터의 죽음은 벌레의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의미한 죽음이라는 뜻이다. 오다 마코토의 바람대로 소녀 9명의 죽음을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무의미한 죽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요즘 상황을 보면 그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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