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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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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금융허브 국가의 최후

등록 2008-12-11 16:44 수정 2020-05-03 04:25

이 나라는 주변의 경제대국들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나라이므로 지구화된 세계경제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그 경제대국들 사이에 오가는 돈이 머물러 가는 ‘금융허브’로 탈바꿈하는 길뿐이다- 최소한 이것이 이 나라 지배층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과감한 조처를 취하게 된다. 첫째, 금융체제를 완전히 자유화해 전면적인 규제 철폐는 물론 몇 개의 이 나라 주요 은행들에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거듭나게끔 자산의 크기를 불릴 수 있도록 온갖 장치를 마련한다. 둘째, 외국의 금융기관들이 이 나라로 들어올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 법인세를 파격적으로 낮춘다. 셋째, 금융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이 나라 물가의 인플레를 피하고 통화의 가치를 높게 유지해야만 하므로, 이 나라 중앙은행은 이것을 이자율 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는다.

어느 금융허브 국가의 최후 (일러스트레이션/김대중)

어느 금융허브 국가의 최후 (일러스트레이션/김대중)

싼 이자, 주식 고공 행진, 떨어지는 환율…

모든 것이 잘되어나갔다. 높은 교육 수준과 괜찮은 경제 ‘펀더멘털’을 가진 나라이므로 국제적 신뢰도 좋았거니와, 혁신적인 금융 자유화를 기회로 포착한 이 나라 은행들의 공격적인 자금 조달과 자산 팽창 노력으로 외국에서 자금이 물밀듯 밀려왔다. 밀려든 자금은 이 나라의 주식과 부동산 등 각종 자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은행은 자국 국민들에게 싼 이자로 모기지 융자를 풀어 부동산 붐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고, 사람들도 넘쳐나는 자금에 카드로 긋고 마이너스 통장을 써가며 소비에 몰두해 가계부채는 졸지에 반 정도가 늘어났고, 주식시장도 계속 고공 행진을 이어갔다. 몰려든 외국 자금으로 인해 환율이 떨어졌고 그에 따라 물가 상승이 일어날까봐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한껏 올리게 되자, 은행이나 기업 심지어 일반인들조차 떨어진 환율과 높은 이자율을 이용해 외국에서 더욱더 많은 돈을 꿔오는 일종의 순환고리가 만들어지게 되었지만, 괜찮다. 이것이야말로 주변 지역을 흐르는 자금의 큰 줄기를 국내로 끌어들여 자산 가격의 지속적 상승과 그를 통한 부를 유지한다는 ‘금융허브’의 본래 계획이 아닌가. 우물은 퍼낼수록 더 많은 물이 고이는 법. 안팎에서 가끔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를 이 나라 지배층은 질투와 무지의 소치로 돌려 무시해버리면서 이 순환의 풍차를 계속 돌려댔다. 이 나라 은행들은 과연 ‘글로벌 투자은행’의 본때를 과시하면서 더 많은 외자를 조달해 더 많은 외국 자산에 투자하는 공격적 팽창을 계속했고, 마침내 최대 3개 은행의 총자산 크기가 국내총생산(GDP)의 10배에 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심판의 그날(the Day of ‘Reckoning’)이 왔다. 세계경제의 기후 변동으로 갑자기 이 외자 조달 쪽의 순환고리가 막히게 되었고, 자금 융통이 어려워지자 무수한 단기 외채의 쪼가리로 누덕누덕 기워져 있던 이 나라 은행들의 자산 구조는 갑자기 위기에 봉착한다. 바빠진 은행들은 국가에 손을 벌려보지만, 정부는 몇 년째 계속된 감세 정책으로 이 태산같이 부푼 은행들 앞에서 이미 난쟁이가 된 상태였다. 친하게 지내던 주변 국가에 다시 손을 벌려보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나 가서 알아보라’는 핀잔 아니면 되레 ‘내 빚부터 빨리 갚으라’는 독촉부터 돌아오기 일쑤였다. 떨어지기만 하던 환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배로 올라버렸고, 주가는 10분의 1로 떨어졌으며, 성장률은 무려 마이너스 10%가 되고 말았다. 수입과 수출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이 나라 경제는 완전히 쪽박을 차게 된 것이다.

결국 IMF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은행은 물론 주요 금융기관들이 거의 파산해버렸으며 많은 국민들은 거액의 빚더미에 앉은 상태다. 10년이 채 안 된 ‘금융허브’의 실험은 이렇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슬란드의 실제 상황

우리 정부는 앞으로도 ‘금융허브’를 우리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전혀 굽히지 않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않은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금융허브’ 정책을 이 따위 가상 시나리오까지 써가면서 저주할 게 무어냐고 불쾌해하실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다. 2001년에서 2008년 말 사이에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에서 벌어졌던 실제 상황이다. 우리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있는 나라이니, 이런 일이 한국에서 똑같이 벌어져왔다든가 앞으로 벌어질 것이라는 확대 해석은 금물이다. 그냥 이랬다는 이야기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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