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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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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은 경제민주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재벌개혁 의지 무색케 한 공천이 불러온 민주당의 총선 패배
여야가 경제민주화 약속 안 지키면 제3의 정치세력 부상 필연
등록 2012-04-18 17:08 수정 2020-05-03 04:26

19대 총선 다음날인 4월12일 안랩(옛 안철수연구소)의 주식이 상한가로 치솟았다. 이론적으로 기업의 주가는 현재까지의 기업실적은 물론 미래 가치 변동까지 반영해서 결정된다. 안랩 주가의 초강세는 ‘여당 승리, 야당 패배’의 총선 결과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함축해서 보여준다. 이번 총선은 12월 대선의 전초전 성격으로 불린다. 민주통합당은 총선에서 자체 역량만으로는 정권 탈환이 쉽지 않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안철수 대선 대안론’이 급부상할 수밖에 없어, 관련 기업의 주가 급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정운찬 전 국무총리, 유종일 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특별위원장,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왼쪽부터)은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하나로 뭉쳐 제3의 독자적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인사들로 꼽힌다.

»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정운찬 전 국무총리, 유종일 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특별위원장,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왼쪽부터)은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하나로 뭉쳐 제3의 독자적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인사들로 꼽힌다.

민주당 패배의 원인은 민주당 자신

우리 국민은 4년6개월 전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들을 위해 경제를 살리겠다며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와 ‘747’(7% 성장·국민소득 4만달러·세계 7위 경제대국),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고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친재벌 정책으로 양극화만 더 심화시키며, 정권심판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왜 이런 아이러니가 벌어졌을까?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좌파 신자유주의를 자칭한)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양극화와 경제침체를 더 심화시켜 원조 신자유주의인 이명박 정부의 집권 배경이 되었다”고 진단했다. 이명박 정부를 초대한 것은 바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현 민주통합당)의 실정인 셈이다. 야당 지지자들은 (친재벌 정책의)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자업자득이라며 국민 탓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경제 개혁 약속 불이행과 경제난을 심판한 국민을 과연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도 유사한 아이러니를 목격했다. 19대 총선의 최대 이슈는 일찌감치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으로 압축됐다. 재벌당으로 불려온 한나라당조차 당명을 바꾸고,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명문화하고, 대표적 재벌개혁론자인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에 영입하는 ‘전신 성형수술’을 감행했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느냐”고 비웃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제1당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단독 과반 의석까지 확보했다. 한때 100석에 미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던 처지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원인은 5년 전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민주당 자신이다. 민주당의 오만이 차려준 밥상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새누리당에 역전의 기회를 줬다는 평가가 많다. 민주당은 올 들어 한때 지지율 1위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재벌 개혁 정책의 설계자인 유종일 경제민주화특별위원장에게 공천을 주지 않아 ‘초대형 사기극’이라는 비난을 받고, 야권 연대 추진 과정에서 잡음을 빚으며 지지율 하락을 자초했다. 박영선 전 최고위원은 “공천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국민은 민주당이 개혁을 제대로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 회의감에 빠졌다. 민주당은 새누리당과의 차별성을 상실하고, 오히려 새누리당의 ‘위험한 거대야당’ 견제론이 유권자에게 먹힐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장 재벌개혁 법제화 나서야

박선숙 민주당 선대본부장은 공천 논란 이후 “지난 1월에 비춰볼 때 3개월 만에 30석을 잃었다”고 자탄했다.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기준으로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의석수는 각각 127 대 106이다. 박 의원의 말대로 민주당이 30석을 잃지 않았다면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의석수는 97 대 136이 됐을지도 모른다. 민주당은 단독 과반 또는 제1당에 올랐을 것이다.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유종일 민주당 경제민주화특별위원장, 선대인 세금혁명당 대표 등은 이번 총선에서 경제민주화 실현에 도움이 될 후보 20명을 선정하고, 유세 지원 활동을 위해‘ 구구팔팔응원단’을 결성했다. 이들 후보 중에서 박영선, 송호창, 이학영, 노회찬, 심상정 등 절반이 당선됐다. 이는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평균 당선율을 상회한다. 민주당은 2009년 재보선, 2010년 지방선거, 2011년 서울시장 선거의 3연타석 안타에 이어 총선에서 그랜드슬럼을 기록할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국민은 더 이상 선거용 고무도장이 아니다. 특정 정당의 고정팬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국민은 시대의 요구를 제대로 구현할 믿을 수 있는 정당을 선택한다. 30대 그룹의 한 임원은 4월12일 “총선 전날까지만 해도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의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올지 몰라 초긴장 상태였다”며 “하지만 새누리당이 1당 유지는 물론 과반수까지 장악해 분위기가 180도 급반전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이제 개혁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대다수 서민이나 중소기업, 영세 자영업자들의 삶의 문제가 됐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혁을 통해 국민의 삶을 개선시키리라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정권은 누가 권력을 잡든 오래갈 수 없다.

19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는 여야의 개혁 의지와 진정성을 확인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여야는 당장 경제민주화, 재벌 개혁을 위한 법제화에 나서야 한다. 가사 상태에 빠진 이명박 정부나 차기 정부에 책임을 미룰 이유가 없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이미 총선 후보단일화 때 공동정책에 합의하고 19대 국회 입법화를 약속했다. 또 여야 모두 개혁의 큰 방향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는 만큼 특별히 어려울 게 없다.

이에 덧붙여 민주당은 향후 지도부 개편 때 당의 정체성에 맞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부터 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대표·원내대표·정책위의장 등 최고위직 3명 중에서 2명이 모피아 출신이다. 민주당이 친재벌적인 모피아의 한계를 벗지 못하는 한 새누리당과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힘들다.

대선 예비후보들도 개혁을 구체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놔야 한다. 특히 민주·통합진보당은 개혁을 대선 후보 단일화의 플랫폼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단일화의 명분도 살릴 수 있다. 차기 정부의 주요 경제부처 책임자에 친재벌 모피아 출신을 배제하고, 금융위원장·공정거래위원장·국세청장·검찰총장 등 4대 사정기관 책임자들에 대한 섀도캐피닛(그림자 내각)을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또 공동정부를 만들어, 서로 개혁의 동반자이자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신뢰 못 얻으면 새로운 대안 부상할 것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은 4월12일 총선 승리 기자회견에서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렸던 모든 것들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다”고 공약 이행을 다짐했다. 여당도 총선에서 기사회생했지만, 정신을 못 차리면 언제든 다시 곤두박질칠 수 있다. 사실 새누리당의 총선 공천은 민주당보다 못했다.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 대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자는 맹목적 시장자유주의자나 친재벌주의자를 공천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서울·경기 등 수도권 유권자의 심판과 개혁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야 대선 후보 모두 유권자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한다면 새로운 대안이 부상할 수밖에 없다. 안철수·정운찬·김종인·유종일 같은 경제민주화 인사들이 하나로 뭉쳐 제3의 세력을 형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대 총선은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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