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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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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준법경영의 불모지대

해외 도피 중인 한상률에게 거액 자문료 준 대기업들…
후진적 지배구조, 경영철학 부재 등이 비윤리경영 낳아
등록 2011-04-06 18:23 수정 2020-05-03 04:26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관련된 거액의 기업 자문료 스캔들이 점입가경이다.
그가 2009년 초 그림 로비 의혹을 뒤로한 채 비밀리에 출국해 미국에 머무는 동안, 국내 기업들이 자문료 명목으로 수억원대의 거액을 건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기업만도 대기업 3곳과 주정업체 4곳 등 7곳에 달한다. 한씨는 기업에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고 정상적으로 받은 자문료라고 해명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기업이 사실상 해외 도피 중인 사람에게 돈을 주면 도피자금을 제공했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 이를 의식한 때문인지 일부 대기업은 돈세탁까지 해서 자문료를 건넨 정황도 포착된다. 떳떳한 돈이라고 생각했다면 굳이 이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 지난 2월28일 오후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검찰 소환조사를 받으려고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가는 도중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 지난 2월28일 오후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검찰 소환조사를 받으려고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가는 도중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기업 스캔들에 무감각한 한국 자본시장

국세청 현직 간부들이 이 과정에 관여한 정황도 속속 드러난다. 이번 사건은 1997년 대선 때 ‘세풍 사건’을 연상시킨다. 현직 국세청 차장이 기업들로부터 160억여원의 정치자금을 직접 ‘모금’해 큰 충격을 주었다. 기업들은 흔히 국세청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 사건은 15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국세청의 막강한 권력을 재확인시켜주었다. 또 앞에서는 준법과 윤리를 강조하면서 뒤로는 불법의 위험을 감수하는 한국 기업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준다.

20년 가까이 경제기자를 한 필자의 눈길을 끈 또 하나의 현상은 이런 대형 기업 스캔들에 무감각한 한국 자본시장의 모습이다. 비단 이번 사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형 기업 비리 스캔들이라고 할 수 있는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 때도 관련 기업의 주가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기업의 법 위반 행위, 심지어 최고경영자의 개인적 일탈 행위에도 바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선진국 시장과 대조를 이룬다. 키스 다시 미국 기업윤리임원협의회 사무총장은 지난 3월28일 한 강연에서 선진국의 다양한 사례를 소개했다(미국 기업윤리임원협의회는 윤리 및 준법경영 담당 임원들의 모임으로, 회원 수가 1300여 명에 이르는 이 분야 최대의 비영리단체다). “도요타자동차는 2010년 초 일부 부품 불량으로 인한 리콜 사태로 주가가 폭락하면서 150억달러 손실, 골드만삭스는 2008년 금융위기 때 300억달러 손실, 휼렛패커드는 2010년 최고경영자의 섹스 스캔들로 150억달러 손실, BP는 기름 유출 사고로 1천억달러 손실….” 선진국 시장은 이처럼 기업들의 비윤리적 스캔들에 엄한 처벌을 내린다. 시장이 일종의 사회적 경고등 노릇을 한다.

한국과 선진국 시장은 왜 이리 다를까? 다시 사무총장에게 물어봤다.

“대기업에는 내부적으로 수많은 임직원이 있고 외부적으로도 많은 투자자, 협력업체, 관련 기관이 있다. 이들은 기업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주식 가격이 그대로 유지되면 유리한 사람들이다.” 대기업의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이미 기득권화돼 있기 때문에, 기업 스캔들이 터져도 주가 유지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일종의 ‘묵시적 담합’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런 담합의 힘은 기업 규모가 크고 사회적 영향력이 강할수록 더욱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처럼 소수 대기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경제력 집중이 심한 나라일수록, 시장의 사회적 경고등 역할과 정화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어진다. 다시 사무총장은 “기업 관련 스캔들이 터졌을 때 언론이 이를 얼마나 제대로 보도하는지도 중요하다”며 흥미로운 말을 덧붙였다. “개(언론)는 자신에게 먹을 것(광고)을 주는 주인(대기업)의 손을 물지 않는다.”

기업 스캔들에 시장이 무감각한 또 다른 원인으로는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꼽을 수 있다. 기업에는 엄격한 내부 규범이 있다. 직원의 사소한 비리나 부정도 엄히 처벌한다. 하지만 직원 개인이 아닌 기업의 이익을 위한 범죄행위- 담합·탈세·비자금 등-에는 관대하다. 오히려 당연시하는 풍조까지 있다. 기업 총수가 관련된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총수가 범죄행위와 관련돼 물러난 일이 여러 번 있다. 삼성, 현대차, 한화, 두산 등 한 손으로 꼽기 벅찰 정도다. 하지만 이들은 대국민 사과 이후 짧은 휴지기를 거쳐 모두 경영에 복귀했다. 대기업에서는 임직원이 총수를 대신해 사법 처벌을 받는 것을 일종의 충성의 징표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기업을 총수의 사적 소유물로 보는 인식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의 후진적 지배구조는 준법경영과 윤리경영을 어렵게 하고, 기업 스캔들에 시장이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윤리경영 선언한 SK도 자문료 제공

때마침 삼성이 4~5월 중에 전 계열사에 걸쳐 준법경영 선포식을 갖겠다고 발표했다. 삼성 사장단회의에서 박근희 삼성생명 사장은 “준법경영은 회사 경영에서 필수적 요소가 됐다”고 강조했다. 삼성은 어느 기업보다 엄격한 윤리 규정이 있다. 하지만 그 적용은 이중적이다. 일반 직원은 협력사로부터 단 몇만원짜리 접대를 받아도 징계를 받는다. 하지만 비자금 사건으로 형사처분된 많은 고위 경영진 중에서 사내 징계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삼성의 김상균 준법경영실장은 “직원들이 스스로 준법경영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하반기에는 준법경영 교육, 사내점검 체계 구축을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준법경영은 관련 규정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회사가 거창한 선언을 했느냐 안 했느냐보다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SK는 그 좋은 사례다. SK는 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이후 2007년 그룹 컴플라이언스실을 설치하고 윤리경영 실천을 다짐했다. 그룹 총수인 최태원 회장은 기업의 반부패경영에 앞장서고 있는 유엔 글로벌콤팩트 국제이사를 맡아 안팎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게 자문료를 준 기업 리스트에는 SK를 대표하는 두 회사의 이름이 올라 있다.

전문가들은 준법경영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3대 요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준법경영을 위한 제도와 이를 중시하는 기업문화, 최고경영자의 리더십(경영철학)이다. 특히 최고경영자의 구실이 중요하다. 잭 웰치 전 GE 회장에 관한 일화가 있다. 그는 직원을 평가하는 데 두 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하나는 일을 제대로 했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가치에 부응했는지이다. 그는 직원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면 바로 해고를 했다. 또 둘 중 하나만 충족하면 기회를 한 번 더 줬다. 그는 실적이 아무리 좋은 직원이라도 기업가치를 훼손하면 눈감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경제 전체 공멸할 수도

사회책임경영이 글로벌 경제의 대세로 자리잡아가며, 선진경제와 후진경제의 기준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사회책임을 잘 수행하는 기업이 경영실적도 좋은 경제는 선진경제다. 사회책임과 경영실적이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제는 후진경제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이런 공식이 꼭 들어맞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런 예외가 계속 유효할 것 같지는 않다. 영국은 오는 6월 반부패법을 제정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나라에서 부패 사건을 저지른 기업이라도, 영국에서 처벌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시장이나 국민은 기업의 부패 스캔들에 대해 ‘봐주기 관행’이 여전하다. 한 미국인 경영학 교수는 “한국 대기업의 비자금 사건이 미국에서 터졌다면 벌금이나 추징금이 한국 법원의 선고액보다 수백 배 많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기업이 지금처럼 준법경영을 말로만 하고 한국 시장이 이를 눈감아주는 관행이 지속된다면, 한국 기업, 나아가 경제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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