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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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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희비극

등록 2012-05-23 11:29 수정 2020-05-03 04:26

1.
‘5월 광주’의 그림자는 짙고, 깊다. 전두환 일당이 광주의 시민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묵인하지 않았다면, 1980년대의 피 끓는 청춘들이 망해가는 옛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부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학살자에 맞설 무기를 벼리는 데 국가보안법의 금지선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악마와 싸울 땐 악마를 닮지 않도록 조심하라”던 니체의 경고보다, “쥐를 잡는 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냐”던 덩샤오핑의 절박함이 더 솔깃할 때였다. 수많은 젊은이가 공장으로 스며들고, 도서관에서 투신하고, 제 몸에 불을 붙여 ‘전두환 파쇼 도당’에 맞섰다. 두려움은 저항의 적이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은 전두환 독재 시절 합법적 저항은 불가능했다. 사회운동가들은 조직을 지키려고 논의를 비밀스레 진행했다. 레닌이 정초한 ‘민주집중제’를 강조했다. 일사불란한 저항이 선이었다. 소수 의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작은 것’에 대한 감수성은 사치로 치부됐다. 극단이 극단을 부르던 시대였다. 마르크스였을 게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한 이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그때, 우리는 악마와 싸우느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2.
‘피포위 의식’과 ‘순교자 의식’. 정치체로서 북한의 심상은 이 두 어구로 요약된다. 옛 소련과 중국이 형제국 북한을 버리고 남한과 수교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는 고립무원. 자연재해까지 겹쳐 경제가 무너지자 인민들이 대거 이탈했다. 피포위 의식은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운명이다. 절멸의 공포를 잊으려는 듯, 사회주의 순교자를 자임했고 핵 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외쳤다.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총폭탄 정신으로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자”. 세상이 손을 내밀면 노림수를 의심했고, 외면하면 잊혀질까 두려워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세상을 휘저어놓는 핵실험과 대포동미사일 발사, 군사적 도발…. 흔히 벼랑 끝 전술로 불리는 그들의 ‘자해공갈’은 잊혀지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다. 비난은 쉽다.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3.
나는 경기동부연합이라 불리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행태에서 피포위 의식과 순교자 의식을 본다. 그들의 다수는 현장과 지역에서 오랜 세월 민중의 길을 뚫으려 애써왔으리라. 그 와중에 ‘종북’ 낙인과 국가보안법에 시달린 이가 적잖을 터. 희생과 고난의 삶이었을 테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내 경선 부정을 둘러싼 갈등의 와중에 절대다수가 ‘시민의 눈높이’를 외치는데도, 그들이 ‘당원 동지들에게 오명을 안길 수 없다’며 버티는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는 ‘경기동부 왕따 만들기’가 아니다. 크든 작든 선거 부정이 있었다. 상식과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조·중·동 프레임에 놀아난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한다. 인식체계와 언어가 다르다. ‘역색깔론’이다. 피포위·순교자 의식의 쌍생아다.
그러나 국회의원직은 약자의 징표가 아니다. 탄압받는 자의 운명이 아니다. 국회의원직을 부여잡고서는 진정성을 입증할 길이 없다. 민주집중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듯, 피포위 의식과 순교자 의식도 민주주의와 소통할 길이 없다. 사랑처럼, 민주주의도 ‘홀로 진정성’만으론 불가능하다. 다른 이의 손을 맞잡고 마음을 섞어야 길이 열린다. 내 것을 움켜쥔 손으로 다른 이의 손을 맞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작금의 사태가 마르크스가 말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도 끊이지 않는 숱한 비극적 죽음을 감당하기에도 버겁다. 분신한 노동자 박영재씨의 쾌유를 빈다.

이제훈 편집장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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