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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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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죽으면 사회도 죽는다

등록 2012-05-02 02:26 수정 2020-05-02 19:26

1948년 한국이라는 분단국가가 생긴 이래 노동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없던 날이 지금껏 하루라도 있을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화장발의 민낯은 압축성장이라는 무색무취한 학술용어로 포장된 노동 착취와 수탈에 다름 아닐 터. 이제 더 이상의 ‘전태일·김경숙’은 없는가. 아니다. 지난 3년 사이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 22명이 죽었다. 경영진은 복직 약속을 모르쇠하고, 정부는 수수방관이다. 아는가. 죽은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22명 가운데 유서를 남긴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유서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어떤 희망의 불씨도 찾지 못한 끝 모를 절망을. 아니, 어쩌면 그들은 ‘사회적 타살’을 당한 탓에 유서를 쓸 겨를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쌍용차만이 아니다. 8년 넘게 싸우는 코오롱 노동자, 5년을 넘긴 기타 제조회사 콜트·콜텍 노동자, 1600일이 다 돼가는 재능교육 교사들의 싸움…. 이 땅엔 죽음보다 무서운 사회적 외면을 견디며 몸부림치는 노동자가 너무도 많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어찌해야 하나. 반응성이 0을 향하는,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는 한국 사회를 어떻게 다시 깨울 수 있을까.
지금 다시, 언론의 길을 생각하는 까닭이다. 실핏줄이 막히면 몸이 썩듯이, 언론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면 사회가 죽는다. 생각해보라, 쌍용차 등 이 시대 ‘전태일·김경숙들’의 죽음과 투쟁의 의미를 온 힘을 다해 사회에 전하려는 언론이 얼마나 되는지.
그 한편에서 ‘공정보도’를 내건 언론 노동자들의 전례 없는 동시파업이 장기화하고 있다. 4월27일을 기준으로 문화방송 89일, 한국방송 53일, 44일, 127일째다. 주말 파업을 하는 YTN은 8주째다. 새누리당의 과반 확보로 끝난 4·11 총선 이후 언론 노동자들의 파업 결말을 걱정하는 이가 많다. 그럴 만도 하다. 야당과 시민사회·언론 단체는 ‘언론장악 불법사찰 진상규명 청문회와 국정조사 추진’을 발표하며 해법 찾기에 골몰하지만, 새누리당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총선 다음날 기자들을 만나 “파업을 왜?”라고 되물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태도가 모든 걸 설명해준다. 새누리당은 지난 1월 기자들의 압도적 불신임으로 사퇴한 고대영 전 한국방송 보도본부장을 방송통신심의위 18대 대선방송심의위원에 추천했다. ‘대선 보도도 지금처럼’, 이게 박 위원장의 핵심 메시지다. 그러자 김인규 한국방송 사장은 최경영 한국방송 새노조 공정방송추진위 간사를 해고했고, 배임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은 이진숙 홍보국장을 기획홍보본부장에 승진 발령하는 등 친위체제 강화에 나섰다. ‘무릎 꿇으라’는 협박인데, ‘박근혜’라는 뒷배에 대한 믿음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실 두 방송사 내부 사정만 보면 두 김씨는 벌써 보따리를 쌌어야 마땅하다. 문화방송에선 주요 보직 간부들이 줄사퇴하며 파업 지지와 사장 퇴진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방송에서도 이화섭 보도본부장과 동기인 공채 9기(32년차)까지 파업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두 방송사 구성원에게 두 김씨는 이미 사장이 아니다.
간절히 희망한다. 파업 중인 언론 노동자들이 제풀에 지쳐 자기모멸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결말을 가늠하기 어려운 힘겨운 싸움이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고 잘 버텨 마이크와 펜을 되찾아 일터로 돌아오기를. 그대들의 자존이 만인의 자존에 밑거름이 되리라 믿으며, 뜨거운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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