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헌법 119조 ①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119조 ②항)
‘자유경제’에 관한 포괄 규정인 119조 ①항은 1987년 9차 개헌 논의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강하게 주장했다.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할 대상에 기존의 ‘개인’ 외에 ‘기업’을 추가했다. 박정희·전두환식 ‘관치경제’의 폐해를 견제하려는 의지가 실린 것인데, 이후 재벌기업이 세력을 무한 확장하는 헌법적 근거가 됐다. 반면 ‘경제 민주화’ 조항으로 불리는 119조 ②항은 민주정의당의 헌법개정위원인 김종인이 입안을 주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이 조항에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대통령 노릇을 하던 전두환도 이 조항을 삭제 또는 완화하려는 속내를 내비쳤다. 대자본의 집요한 로비가 결실을 거둘 뻔했다. 그때 김종인이 ‘수’를 썼다. “각하, 기업 힘이 세지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재계 7위 국제그룹을 공중분해한 장본인인 ‘군인 전두환’이 버럭 화를 냈다. “뭐? 감히 어따 대고.”
119조 ②항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남재희씨의 책 엔 김종인이 밝힌 이 조항의 입법 취지가 이렇게 인용돼 있다. “한국 경제는 1962년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압축성장을 이룩하였다. 압축성장은 자유시장경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경제성장의 효율만을 강조하여 일부 대기업 집단에 자원을 인위적으로 집중 배분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벌그룹이라는 거대 경제세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에 압도적으로 열세이다. 하지만 경제세력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고 이로써 정치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세력이 사회조화를 위하여 경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면 경제세력은 자본주의의 자유시장경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이 경우 한국과 같은 현실에서 경제세력은 언론, 법률가 등을 총동원하여 헌법소원이라는 방식으로 정치세력의 의도를 무산시키려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이다. 결과는 정치세력은 좌절할 수밖에 없고 사회조화는 이룩될 수 없다. 이에 대한 역사적 사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법제화하였을 때 미국의 각종 이익집단이 위헌을 제기하고 이를 대심원(대법원)이 수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헌법 제119조 ②항은 이러한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한 것이다.”
대자본과 보수 언론은 그 뒤로도 개헌 논의가 일 때마다 119조 ②항을 ‘폐지 1순위’로 꼽아 모질게 공격했다. 왜? 이 조항이 없었다면, 삼성이 위헌소송을 냈던 금산분리법에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하려는 ‘상생법’, 골목상권까지 파고든 대형마트로부터 재래시장과 영세 자영업자를 보호하려는 ‘SSM법’의 입법 근거도 바로 119조 ②항이다. 119조 ②항은 경제적 약자의 방패다.
마침 민주당의 ‘헌법 제119조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가 ‘경제 민주화를 위한 43개 정책과제’를 발표했다(줌인 참조). 대자본의 횡포와 국가의 무기력으로 질식사 위기에 몰린 헌법 119조 ②항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을 사회적 논의의 촉매가 되기를 바란다.
사족: 현행 헌법 119조는 이전보다 후퇴한 측면이 있다. ‘기업의 자유’를 명문화했을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과 5공 헌법에서도 손대지 못한 제헌헌법 84조의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한다는 불변의 기본권 조항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6월 항쟁으로 몰아낸 군부독재의 자리를 자본독재가 꿰찰 수 있도록 뒷문을 살짝 열어둔 것이었을까?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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