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땡볕 아래서 수확한 텃밭 작물이 풍성하다.
한낮 무더위를 피해 오후 4시 넘어 텃밭으로 향했다. 차 안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핸들 잡은 팔뚝마저 따갑다. “서울 지역 현재 기온은 35.9℃입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날씨 소식이 무시무시하다. ‘일이나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밭에 도착하니, 외유 탓에 한동안 밭에 오지 못한 큰형과 ‘개근상’ 막내가 먼저 도착해 얼굴이 벌게져 있다.
장마 지나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습기와 땡볕을 먹이 삼아 풀이 삽시간에 온 밭을 뒤덮었다. 장마 직후 예초기 한 번 돌린 것 빼고, 풀 잡아주기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우후죽순 자라난 풀은 순기능도 있다. 키가 훌쩍 큰 풀은 쨍한 햇볕을 가려 작물에 그늘 구실을 해준다. 지면을 온통 풀이 덮었으니, 부족한 수분이 증발하는 것도 늦출 수 있다. 장마가 지나면 잎채소는 수명을 다하기 마련인데, 풀이 뒤덮은 밭 상추는 2~3주 더 수확이 가능했다. 게으름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기적이다.
텃밭에 쳐놓은 가림막(타프)이 햇볕에 삭았던 모양이다. 몇 주 전 바람이 시원하게 불던 날, 박음질한 선을 따라 두 동강 났다. 역대급으로 덥다던 지난해엔 그래도 1년은 버텨줬다. 올해 더위가 더 심한 모양이다. 찢어진 가림막은 평상 덮개가 됐다. 텃밭 동무들은 그늘을 찾아 햇볕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늘 위치는 시간대에 따라 달라진다. 오후 4시를 넘긴 시각, 호박밭 주변에 길게 그늘이 생겼다.
10분이나 버텼을까? 밭에 나선 순간부터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혔다. 금세 등판에서 땀이 났고, 급기야 가슴팍에서도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햇볕은 바늘처럼 매섭게 피부에 박혔다. 윗옷이 흠뻑 젖었다. 숨이 가빠졌다. 그늘에 들어오니 살 것 같았다.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땡볕만 피해도 세상이 달라 보였다. 물 한 모금 달게 마시고 밭을 둘러봤다.
고추는 더위를 잘 버티고 있다. 물이 모자라 군데군데 잎이 말리기는 했지만,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다. 지난해 서리 내릴 때까지 열매를 내줬던 가지가 올해는 시름시름 한다. 더위와 물 부족 탓인지 시장에서 파는 것만큼 큰 가지는 몇 개 안 되고, 대부분 중간 크기 당근 정도로만 자랐다.
콩과 팥은 장마철에 키가 훌쩍 자라, 중간에 심은 바질에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런데 땡볕이 연일 이어지면서 콩과 팥의 기세가 꺾였다. 햇살에 노출된 바질은 일주일 만에 말라붙어 앙상해졌다. 두 차례 솎아준 당근은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까지 커졌다. 뽑아 씻어 씹으니 오도독오도독 맛이 제대로 들었다.
올봄 농사 최대 히트작은 호박이다. 애초 조선호박, 애호박 씨를 뿌렸다가 발아를 안 해 걱정이 많았다. 뒤늦게 심은 만차랑단호박 씨앗 10개 중 7개가 발아해 가히 ‘숲’을 이뤘다. 밭장이 만들어준 아치형 지지대를 따라 줄기를 뻗어가며, 우리 밭에서 생육이 가장 왕성했던 작두콩까지 위협할 정도다. 그간 잎과 줄기를 제법 수확해 된장국으로 즐겼는데, 매주 실한 열매도 네댓 개씩 내준다. 내년엔 수확 면적을 늘리자고 이구동성이다.
장화 신은 발바닥까지 땀이 찼다. 온통 진초록으로 빼곡한, 뜨겁게 달궈진 텃밭에서 매미 소리가 우렁차다. 수확한 작물을 나누고 차에 올랐다. 라디오 뉴스 말미에 “서울 지역 현재 기온은 35.4℃”란 말이 나온다. 이렇게 또 세월이 간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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