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사의 계절이 시작됐다. 남편(왼쪽)이 가지치기한 포도나무를 살피고 있다.
농사의 계절이 시작됐다. 겨울 동안 땅속에 잠들었던 벌레들이 기지개를 켜며 으드득 근육을 비트는 소리가 들린다. “얘들아, 이제 나가서 알을 까고 한번 시작해볼까!” 지난해 포도밭 농부를 고통스럽게 했던 벌레들이 늘어지게 자고 이제 눈을 반짝거리며 채비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섭다. 지난해의 농사 트라우마, 몇 개의 고통이 되살아난다.
특히 열점박이별잎벌레, 제일 무섭다. 무지하게 알을 까고 순식간에 잎을 다 먹어치워 포도나무를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봄부터 가을까지 대하소설을 한장 한장 읽어내는 기분으로 한잎 두잎 격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포도밭이 초토화됐고 열매는 반도 거둬들이지 못했다. 말라가는 잎과 함께 농부의 눈도 퀭해졌다. 포도를 제대로 수확 못한 것보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인간을 보는 것이 더 괴로웠다.
“올해는 포도밭에 잡초 제대로 잡아라. 세상에! 포도밭에 잡초하고는, 남부끄럽더라.” 어머니의 트라우마는 우리 포도밭에서 본 잡초다. “올해는 포도 제대로 따야지. 약 안 치면 병충해 못 잡아. 친환경은 개뿔! 절대 못 잡아.” 동네 어른들은 친환경 트라우마가 있다. “나는 올해 절대 손으로 벌레 안 잡는다. 당신 방식대로 하려면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하라고! 철두철미, 지금부터 방어해야 한다고! 알지?” 나도 한마디 보탠다. 남편은 연필심을 씹으며 말이 없다. 벌레도 문제지만 이 딱딱거리는 여자가 더 큰 문제다, 하는 표정이지만 말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남편의 농사법과 고집이 그저 두렵다. 올해는 또 어떤 실패를 맛보고 망연자실하려나 겁난다. “30년 농사지은 동네 베테랑 아저씨들이 말하잖아. 약을 안 치면 절대 그 벌레 못 잡는다고. 올해도 왕창 나타나면 또 어쩔래, 응?” 나는 전쟁을 앞둔 겁 많은 병사처럼 뒷전에 서서 “방어해! 방어해!” 같은 말만 공허하게 계속한다.
“약은 한번 치면 다 무너진다. 지금까지 지켜온 땅의 미생물 생태계가 다 허사가 돼. 농부는 나무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땅도 키운다는 말이 있잖아. 올해는 좀더 좋아질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봐.” 대장이 이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쳐준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왠지 억울하기도 하다. 툴툴거리며 포도밭으로 간다. 포도나무 아래 풀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줄지어 선 포도나무들은 가지치기가 끝나 말끔하게 정돈됐다. 입학식에 줄지어 선 까까머리 중학생 같다. 죽어라 말 안 듣는 밤톨 머리 쓰다듬듯이 포도나무 줄기를 만져본다. 다정한 마음이 올라온다.
이웃 복숭아밭 농부도 밭정리가 한창이다. 그 또한 지난해의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다. 모든 복숭아가 얼룩져 1년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그런데도 봄이 오니 노래하면서 밭일하고 있다. “작년에 망쳤다고 올해 농사를 안 지을 수 있나? 망치고 또 망쳐도 계속하는 것이 농사지. 올해는 잘되겠지, 그런 맘으로.” 날이 좋으니 동네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는 돼지감자를 캐내고 할아버지는 마늘에 덮어두었던 보온덮개를 걷어낸다. “마늘이 탈 없이 잘 살았네!” 농사 트라우마는 치유한다기보다 봄 농사를 시작하면서 흘려보내는 것인가 싶다.
글·사진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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