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미얀마에서 군부가 첫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미얀마 국민은 1962년 군부정권이 들어선 뒤 2015년 총선에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압승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기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군정 치하에서 눈 가리고 입 막힌 채 수탈당했다. 그들에게 5년의 민주화 시절은 짧지만 너무나 강렬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젊은이들이 총을 들고 무장투쟁에 나선 원동력이자, 군부가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없는 이유다.
국제사회도 미얀마 국민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 특히 미얀마에 대한 한국 시민의 지지와 연대는 현지 시민들도 감사와 우정을 표현할 만큼 각별하다. 역사적 경험이 비슷한 까닭에 공감이 크다. 우리도 오랜 일제 강점과 군사독재, 1980년 5월 신군부의 광주 학살, 끈질긴 민주화운동으로 7년 만에 민주주의제도를 되찾았다.
<한겨레21>은 미얀마 민주화운동 1년을 맞아 미얀마 독립언론 기자들이 직접 취재해 보내온 르포로 민주화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반응과 미얀마 군부의 움직임에도 주목했다. 미얀마 국민이 거리에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목 놓아 외치는 구호가 하루빨리 현실이 되길 바란다.
“아예더봉 아웅야미!”(혁명은 승리한다!)
*<한겨레21>에 미얀마 현지 소식을 전해온 필자는 모두 <미얀마 보도사진 통신사>(MPA·Myanmar Pressphoto Agency) 소속 현직 기자입니다. MPA는 미얀마 군정에 등록되지 않은 독립언론 매체이며, 필자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지역을 특정하지 않고 필명을 썼습니다. _편집자
“정치요? 솔직히 관심 없었어요. 그저 내 일 열심히 하고 마음 편하게 살면 충분하다고 여겼죠. 그렇지만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불의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미얀마 양곤에서 여행가이드로 일했던 20대 버마족 여성 퓨는 “무슨 이유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냐”는 질문에 덤덤히 말문을 열었다. 그는 쿠데타가 일어난 뒤 학생들과 거리집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한 공무원을 지원하는 활동도 했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무차별 총격과 참혹한 살상에 피 흘리며 쓰러지는 시민들을 보고 결국 무장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퓨는 미얀마 북부 카친주의 밀림 지대에 있는 민족통합정부(NUG) 산하 시민방위군(PDF) 신병교육대를 찾아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수료한 그는 현재 전선 지역 캠프에 투입돼 저격수로 복무하고 있다.
그가 밝힌 시민방위군 대원의 일과는 빡빡하기 그지없다. 새벽 4시면 기상나팔 소리가 울리고, 개인정비 시간을 가진 뒤 5시20분에 아침 점호를 한다. 점호가 끝나면 구보를 하는데, 넓은 연병장을 꼬박 15바퀴 달려야 한다.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가 되면 훈련 시작이다. 오전 11시까지 전술과 교전 기술 훈련이 있다.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고 잠시 숨을 돌린다. 오후 훈련은 1시부터 3시까지 진행된다. 훈련이 끝나면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대개 주둔지 청소, 식수 길어 오기, 부대 내 경작지에 물 주기 같은 일을 한다. 오후 5시가 되면 저녁을 먹는다. 그 뒤엔 자유시간이지만 저녁 8시가 되면 적의 항공기가 관측하지 못하도록 모든 불을 꺼야 한다. 밤 9시 취침 구호와 함께 잠든다.
시민방위군으로서 힘든 점은 없는지 묻자 퓨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려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모든 게 부족한 밀림 속 생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전장….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웃음을 보이며 지내고 있습니다. 남성 전사들과 함께 훈련받으면서 신체적으로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를테면 체력단련 중 팔굽혀펴기를 하는데, 저는 살면서 한 번도 팔굽혀펴기를 해본 적이 없거든요. 팔을 굽힐 때 가슴이 지면에 닿으면 안 된다는 지시에 토악질이 나오는 걸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버텨낸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퓨는 무장투쟁에 참여하고 나서 몸과 생활이 고된 것보다도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딸이다보니 부모님이 저를 특히 애지중지하셨어요. 그 마음을 알기에 다섯 달째 집에 전화조차 안 하고 있어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요.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이잖아요. 비록 가족과 떨어지더라도 제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려고 합니다.”
퓨는 다음 세대가 좀더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많은 걸 잃는다 해도 저는 감내할 수 있습니다. 혁명이 승리하면 우리 모두는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날이 오면 나 역시 돌아오겠노라 친구들에게 말하고 고향을 떠나와 총을 들었습니다.”
미얀마 북서부 도시 칼레이 시민방위군 제1대대 부관인 소수민족 출신 20대 청년 웨이나인우는 무장투쟁에 뛰어들기 전 사가잉주 칼레이대학 총학생회장이었다. 졸업 뒤 공무원이 되는 것을 꿈꾸던 친족 출신 청년의 삶은 불법 쿠데타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쿠데타 뒤 칼레이 지역 학생들은 집회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거리로 나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군경과 맞섰어요. 곧 경찰력이 진압을 위해 투입됐고, 그 과정에서 중화기 발포도 했습니다. 비무장 민간인에게 살상무기를 총동원한 거지요. 바리케이드를 지키며 수많은 친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두가 무장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는 데 동의했고, 사냥용 엽총이나 공기총 같은 무기를 들고 모였습니다.”
웨이나인우를 비롯한 칼레이시 청년들은 조악한 무기를 들고 쿠데타 세력에 대항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유혈 진압에서 수많은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투쟁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칼레이 시민군을 창설하고, 저와 동료들은 친족 민족군을 찾아가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을 갖췄습니다. 이후 민족통합정부와 연락이 닿아 부대 명칭을 ‘칼레이 시민방위군’으로 바꾼 뒤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민족통합정부 산하단체로 편입됐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민족통합정부로부터 약간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칼레이 시민방위군은 실질적인 지역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쿠데타 세력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 두 차례 작전지역을 순찰하고 야간에도 경계 작전을 벌인다. 그뿐 아니라 피란민을 위한 구호물품을 이송하거나 지역 주민들이 이동할 때 경호 대원을 파견하기도 한다.
“많이 고단합니다. 낮이고 밤이고 전선에 있다보니 몸과 마음이 힘들 수밖에 없지요. 그럼에도 전투를 마치고 돌아올 때 우리를 환영해주는 주민들의 환호와 웃음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쿠데타 세력과 처음 대규모 교전을 벌이고 동료들과 행군해 캠프로 복귀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늘어서서 저희를 환영해주던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때 느낀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밀려들며 왈칵 울음이 터졌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대원이 울어 그날 눈물바다를 이뤘지요.”
웨이나인우는 미얀마 민족통합정부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저는 소수민족 친족 출신이고, 혁명이 끝나면 민족통합정부가 우리 민족에 자치권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미얀마의 소수민족 모두는 오랜 내전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혁명이 승리하면 연방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친족 민족군과 친주 방위군이 친족의 영토를 스스로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바람이 있다는 걸 민족통합정부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또 민족통합정부가 혁명 승리를 위해 지금보다 더욱 속도를 내줬으면 합니다. 신속히 무장을 갖춰야 전쟁 종식을 앞당길 수 있고, 압제로 고통받는 국민도 해방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국민은 지금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제 민족통합정부가 나설 차례입니다.”
‘쟈디 쳇흐묫’(탯줄을 묻은 땅). 미얀마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그렇게 부른다. 익명을 요구한 카렌족의 한 여성은 시민방위군과 쿠데타군의 교전이 치열해지고 위협이 닥쳐도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10개월을 버텼다. 그러나 2021년 12월15일, 그는 자신의 탯줄을 묻은 고향 레이케이코를 결국 떠나야 했다. 집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고 쿠데타군 병력이 다가오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옷가지 몇 개만 겨우 챙긴 채 놀란 가슴을 달래며 황급히 피란길에 올랐다.
“전투가 나날이 치열해졌어요. 낮이고 밤이고 사방에서 총 쏘는 소리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피란길에 오르던 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에 고단함이 묻어났다. 미얀마 동남부 카렌주에 있는 도시 레이케이코가 도시화하기 시작한 무렵 태어난 그는 평생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의 가족은 지금 미얀마와 타이의 자연국경을 이루는 타웅인 강변에 지은 움막에서 지내고 있다.
쿠데타 세력에 맞서 카렌 민족해방군과 시민방위군이 총력전을 개시하며 레이케이코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1만여 명은 난민이 되어 미얀마-타이 국경지대에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타이에 거주하는 미얀마인, 타이 내 구호단체와 해외 거주 미얀마인의 지원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다.
고향을 떠난 카렌족 여성은 식량, 의약품, 식수, 담요, 천막 등 피란민을 위한 구호물자가 너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먹고 자는 문제야 여기저기 도움을 받아가며 그럭저럭 버티는데, 가장 걱정되는 게 아이들 교육입니다. 수시로 거처를 옮기는 게 일상이다보니 교육은 꿈도 못 꾸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달래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쿠데타 세력이 소수민족 무장단체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공세를 펼치면서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카렌주, 몬주, 타닌타리주 등 미얀마 남부에서 발생한 피란민만 12만 명이 넘는다.
올해 34살인 남성 쿤딴아웅도 2022년 1월6일 삶의 터전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안전지대를 찾아 피란길에 올랐다. 고향인 카야주의 중심도시 로이코에서 교전이 격화돼서다.
“지금 로이코에는 도시 인구의 채 1%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쿤딴아웅이 굳은 얼굴로 전하는 이야기는 처참했다. 로이코에서 본격적으로 시가전이 시작되자 쿠데타 세력 군대는 전투용 헬리콥터를 동원해 도시 전역에 스무 차례 이상 무차별 공중사격을 했다. 민간인 피해가 급증했고, 도시를 떠나는 대규모 탈출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로이코 시민들은 현재 카야주의 인접 지역인 샨주나 국경을 넘어 타이 땅으로 흩어진 상황이다.
피란민 중에는 여성과 노약자, 어린이와 신생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청년과 중장년 남성 대다수가 무장투쟁에 합류하거나 쿠데타 세력의 학살을 피해 피신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쿤딴아웅은 설명했다. “쿠데타 세력은 남자들을 표적 삼아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젊고 기운 있는 이들이 시민방위군에 합류할까 두려운 것이지요. 이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두고 떠나야 했던 남성이 많습니다. 가장이나 보호자 없이 남겨진 가족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일부 주민은 입고 있던 옷 한 벌 외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맨몸으로 황급히 피란길에 올랐다. 그들을 기다리는 밀림과 거친 산악의 환경은 엄혹했다. 비바람을 가려줄 방수천과 들끓는 모기와 해충을 막아줄 모기장이 필요하지만, 대다수는 얇은 비닐이나 옷가지에 의지하고 있다.
전세계를 휩쓰는 코로나19와 변종 바이러스의 창궐도 피란민을 위협한다. 카야주에서 난민을 돕는 한 자선단체 관계자는 “지난해 코로나19 대유행이 벌어졌을 때 피란민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밀림 속에서 지내며 질병 예방과 방역을 제대로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속절없이 쓰러졌어요. 시민방위군 소속 의료팀이 왕진을 나와 치료해주는 것 말고는 어떠한 의료서비스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무차별 공습과 포격으로 갈수록 국민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피란민에게 무엇이 가장 시급하냐”는 물음에 쿤딴아웅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쿠데타 세력은 시민방위군과 피란민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살상 표적이죠. 저희는 낮이고 밤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제 하늘에서 포탄이 날아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쿠데타 세력이 공습하지 못하게 막는 것과 피란민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안전지대를 만드는 게 제일 우선입니다.”
태어나서 자신의 일부인 탯줄을 묻은 땅인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 카렌족 여성과 쿤딴아웅의 바람은 오직 한 가지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견딥니다. 혁명이 승리해 가족 모두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
“미얀마의 시계가 0시로 되감겼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합니다.”
미얀마 제2도시 만달레이에 거주하는 중년 남성 모툰은 말아 쥔 주먹으로 가슴께를 연신 두드리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자녀 셋을 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버지다.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 그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두렵다고 했다.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외출할 일이 생기면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시내 곳곳에서 중무장한 병력이 수시로 검문하며 휴대폰을 빼앗아 인터넷 검색 기록과 메신저 사용 내역을 검사합니다. 민족통합정부나 시민방위군에 대한 게시물을 검색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현장에서 연행됩니다. 현금이나 귀중품을 강탈당하는 일도 빈번합니다. 한번은 친구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데 군인들이 붙들어 세우더니 휴대폰을 빼앗더랍니다. 해코지당할까 두려워 순순히 건넸는데, 갑자기 총부리를 들이밀며 온라인뱅킹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잔액을 모두 자기들 계좌로 이체하라고 강요하더래요. 결국 저축해둔 돈을 모두 빼앗겼답니다.”
모툰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쿠데타군의 유혈 진압으로 쓰러지는 모습도 생생하게 목격했다.
“집회 현장에서 청년들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고 줄로 묶어 가축을 끌고 가듯 붙잡아가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초반에는 저도 쿠데타 세력의 만행을 널리 알리려 휴대폰 카메라로 그런 모습을 찍어 페이스북에 공유했어요. 지금은 군부 쪽에서 사진이나 영상 속 지형과 구도를 분석해 촬영 장소를 찾아와 모두 체포하고 있습니다. 나와 주변 사람이 다칠까봐 함부로 휴대폰을 꺼내 들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예전에 비해 대도시에서의 반군부 투쟁이 극심한 탄압으로 위축됐다고 전했다.
“정치활동이나 반군부활동을 하면 더욱 잔혹한 탄압의 표적이 됩니다. 첩자들의 활동이 기승을 부려, 도시에서 집회를 이끌던 지도자나 청년 대다수가 체포를 피해 농촌 지역으로 떠나거나 무장투쟁에 합류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대학생과 파업 참여 노동자들이 주도해 도시 곳곳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거나 시민방위군 게릴라 부대가 쿠데타군 병력을 산발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 같은 대규모 대중집회가 일어나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판매업에 종사하는 30대 여성 테잉기는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금이 간 일상이 쿠데타로 완전히 망가졌다고 한탄했다.
“코로나19 확산에 이어 쿠데타가 터지면서 나라 전체의 산업과 경제가 2년 가까이 멈춰버렸어요. 먹고사는 게 너무 어렵네요. 우리 가족도 3차 대유행 때 코로나 감염병에 걸렸습니다. 노인들은 제때 산소 치료를 받지 못해 전부 돌아가셨고 젊은 사람들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만약 한번 더 그때 같은 일이 벌어지면 저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거리에선 매일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쿠데타가 미약하게 남아 있던 사람들의 희망을 완전히 부숴버렸어요.”
테잉기는 그럼에도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연대를 포기할 순 없다며 사력을 다해 버티는 국민을 위해 민족통합정부가 혁명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시민방위군에 군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한 공무원들에게 쌀과 채소를 보내주는 일을 하는 친구가 적지 않습니다. 여건이 닿는 한 계속 지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견디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많아지네요. 처음에 민족통합정부는 6개월이면 혁명이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했어요. 어느새 쿠데타가 터진 지 1년이 됐습니다. 민족통합정부의 말을 믿고 버티던 국민 대다수가 현재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연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민족통합정부가 하루빨리 행동을 시작해줬으면 합니다.”
군부는 불법 쿠데타로 미얀마 역사 발전의 시곗바늘을 되돌려놨다.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오천만 국민의 삶을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모툰은 무엇보다 아이들이 미래를 잃어버린 현실을 개탄했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아이들 교육 문제예요. 우리 집도 작은딸이 재작년(2020년)에 대학 입시 시험을 봤어야 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시험이 취소됐습니다. 그 후 쿠데타(2021년)까지 터지며 공교육이 전면 중단돼버렸죠. 온 나라 청년이 한창 배우고 경험을 쌓아야 할 나이에 2년 가까운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아이들은 미얀마어를 읽고 쓰는 법마저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어른들이야 어떻게든 살아나가겠지만 이 아이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지나요? 참으로 막막할 따름입니다.”
미야와디(카렌주), 시셍(샨주), 만달레이, 양곤, 카친주, 사가잉주=제이 파잉, 킨 야다나, 애가도
번역 최진배 〈미얀마 투데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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