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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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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정치에 맞서 정체성의 ‘정치’로

아시아계를 폭행한 청소년들 앞에 무용한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항변과 차별주의자의 전략
등록 2021-07-15 10:29 수정 2021-07-16 02:51
차별주의자의 구분이 가능하면 차별은 없어질 수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티셔츠. tshirtwitter.com 갈무리

차별주의자의 구분이 가능하면 차별은 없어질 수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티셔츠. tshirtwitter.com 갈무리

2021년 7월3일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아시아계 청소년들이 백인 십 대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지나가던 이들이 갑자기 동양인 여학생을 무차별 공격하고 이를 말리던 동양인 남학생까지 구타했다고 한다.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남학생은 “우린 너희에게 아무런 잘못도 안 했다”고 소리쳤지만 폭행하던 그들은 비웃기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오른 이 동영상은 가해자 무리가 찍은 것으로 추정됐다.

서구 사회에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그에 따른 폭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전 지구적 코로나19 유행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를 보면, 코로나19는 중국에서 발원했고 무엇보다 시진핑 중국 정부의 은폐와 늦장 보고/대처로 전 지구적 재앙이 됐다. 이에 따라 중국에 대한 분노가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넘어 (그들이 전혀 구분할 줄 모르고 구분할 필요가 없는) 전체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은 크게 두 가지 목소리다. 한국에서도 이전부터 축적됐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폭발된 중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여지없이 나타난다. “중국인은 전세계의 민폐”이기에 “폭행당해도 된다”는 말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혐오 발언에 대해 “저들이 너와 중국인을 구분할 것 같으냐?”며 “이것은 중국인뿐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에 대한 혐오범죄”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는 몇몇 사람이 있다.

차별하기 위해 정체성을 구분하는 차별주의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어난 이 사건과 이 사건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은 차별과 정체성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됐는지 생각하게 하는 전형적인 사례다. 흔히 사람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목표로 차별과 혐오라는 행위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성별이건 성적 지향이건 인종이건 그들을 차별한 근거를 그 정체성에 고유한 자연발생적 특성인 양 정당화해 차별한다.

차별이 특정한 정체성을 목표로 삼는 게 사실이지만 동시에 차별과 혐오라는 행위로 정체성이 생산된다.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을 차별하는 게 아니라 아시아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행위로 아시아인은 규정되고 만들어진다. 차별과 정체성의 관계는 억압적인 것만 있지 않고 생산적이다. 차별하는 행위는 차별받는 사람들 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무시하고 차별받는 범주로서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 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차별주의자의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라 할 수 있다.

차별주의는 차별해야 하는 존재를 생산하는 한에서만 정체성을 구분하지 그 정체성 안 개체들의 차이에는 아예 관심 두지 않는다. 즉,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봤자 동양인을 차별하기로 마음먹은 인종차별주의자의 귀에 그 소리는 “멍멍!” 하는 소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들리지 않는다.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별주의는 언제나 세상을 정체성으로 구분 짓지만 자신들이 구분 짓는 정체성의 내부 차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관심이 정체성이 아니라 차별 자체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특징에 의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기 위해 정체성을 구분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차별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정체성을 구분한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내 정체성을 상세하게 구분하기가 아니라 차별의 실행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별의 ‘정체성 정치’는 한편에선 같이 구별될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기 위해 함께 묶어버린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폭력이다. 그들이 구분한 것 외의 다른 정체성은 삭제해버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 십 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길거리를 지나가다 때릴 사람이었다. 그 눈에 걸린 사람이 ‘아시아인’이라면 그 사람이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혹은 타이인이든 구별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인식론적 폭력 앞에서 “나는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무의미하다. 이 사건에서 남학생이 외친 말처럼 (혹여 맞은 이들이 중국인이라도) “우린 너희에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절규하더라도 무의미하다. 그들이 맞은 이유는 중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아시아인’이기 때문이다. “왜 구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구별되지 못하는 너희의 잘못이다”라고 말이다.

2020년 8월 성소수자 축제에 참석해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교회 재판에 기소된 이동환 영광제일교회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2020년 8월 성소수자 축제에 참석해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교회 재판에 기소된 이동환 영광제일교회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단 하나의 정체성, 질문만 살아남아서

이것은 차별받는 이들의 내부에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 내가 차별받는 이유가 차별하는 저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너희 때문이라고 말이다. 저 기사에 달린 인터넷 댓글들처럼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는(정확하게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인종차별주의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랑 괜히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되지 않는 중국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구분이 가능해지면 마치 저 차별에서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저들이 아시아인을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한국인에 대해서는 차별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한때 인터넷에 이런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입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다. 티셔츠 앞뒤로 크게 “I am not Chinese”라고 말이다. (장담하건대 이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폭력은 안 당할지 몰라도 비웃음과 멸시는 몇 배로 당할 것이다. “역시 아시아인은 안 돼. 자기들끼리도 저렇게 서로 아니라고 싸우잖아.”)

구분할 필요가 없는 차별주의자의 정체성 정치는 개인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존재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수십 년 터를 지키며 주민이자 이웃으로 살아오며 수많은 관계를 맺었으며, 그 관계만큼이나 내게 주어진 다양한 정체성에서 단 하나의 정체성만을 구분해내고 다른 모든 것은 지워버린다. 이때 지워지는 것은 나의 다른 정체성이 아니라 내 삶의 궤적, 생애가 된다. 내 안의 수많은 욕망과 모순, 삶에서 있었던 수많은 시도와 실패는 다 사라지고 나는 달랑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압착된다.

사실 많은 소수자가 차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내 어떤 정체성을 차별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그들이 차별하려는 ‘그것’으로 융해해버리기 때문이다. 커밍아웃한 게이 목사는 목사로서의 자질과 사목 활동, 신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그에 대한 이야기에서 지워진다.

심지어 성소수자가 아니라 성소수자를 지지한 목사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왜 성소수자 축제에서 축복을 했는지 목회자로서 삶의 궤적과 신학적 이유는 다 삭제되고 달랑 질문 하나만 남는다. “지지하는가, 지지하지 않는가.” 이 질문만 남는 순간 모욕받는 건 축복식에 참여한 목사의 생애 전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애, 주된 목회 방향이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목회자로서 생애, 신학자로서 고민, 그리고 함께 살아온 이웃으로서 그의 삶. 이 모든 ‘삶’이 사라진다. 이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모독이 없다. 이처럼 차별이 수행하는 ‘정체성 정치’는 인식론적 폭력이자 존재론적 파괴 행위다. 2019년 인천 퀴어문화축제의 축복식에 참여했다가 징계받은 이동환 목사의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속한 감리교의 본산인 영국에서 감리교는 2021년 6월30일(현지시각) 동성결혼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저항을 모두 ‘정체성’ 속에 가두다

이처럼 차별주의자의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이들의 존재론적 ‘개별성’도 인식론적 ‘보편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보편’의 위치에 두고 나머지 저항을 모두 다 정체성에 가두는 정치를 한다. 이 정체성 정치에 포획돼 소수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도, 보편적 존재가 될 수도 없다. 즉 자기 생애사를 가진 개별적 존재로서 개인도, 사회 전체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보편적 주체로서 시민도 될 수 없다. 그저 자기 이익에만 허덕거리는 덜떨어진 존재로 가둔다. 목소리를 내면 내는 대로 (그건 아직 보편적인 요구가 아니라서), 안 내면 안 내는 대로 (그것 역시 보편적인 요구가 아니라서) 말이다. 그게 차별주의자의 정체성 정치에서 가장 큰 효과다.

여성학자 권김현영도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반차별 운동은 이런 ‘정체성’ 정치에 맞서는 정체성의 ‘정치’다. 반차별 운동은 차별의 목표가 되는 범주의 사람들을 차별로부터 그들의 존엄과 안전을 지키는 게 중요하기에 언뜻 정체성에 기반한 운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반차별 운동이나 소수자인권 운동을 정체성의 권익만을 지키며 보편적인 것을 외면하는 정체성의 정치라고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진보 진영의 처지가 수세적이 되면 그렇다. 사회 ‘전체’의 보편적 진보가 아닌 특정한 사람들의 권익만을 내세우다 다수가 돌아섰다고 말한다. 소수자인권 운동에 ‘과도하게’ 집중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말 그들이 소수자의 권익에 집중해본 적이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대표적인 게 “나는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 운동은 너무 정체성 운동이라…”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차별주의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여성의, 성소수자의, 소수인종의 저항을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소수자’라는 정체성에 근거한다고 정체성 정치로 가두는 건 다름 아닌 차별주의자의 방식이다.

소수자가 목소리를 냄으로써 그들은 자기를 계시함과 동시에 세계에 참여한다. 차별주의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람들을 하나로 고정하는 정체성에 다른 경로와 경험을 가진 가능성의 목소리를 중첩함으로써 균열을 낸다. 따라서 소수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러 정체성과 가능성이 중첩된 역동적인 존재임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를 위한 운동이다.

우리는 모두 가능성이 중첩된 존재

다시 강조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모두는 가능성의 존재이며 그 가능성이 중첩된 존재 아닌가. 그런 존재여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의 존엄과 사회의 미래는 여기에 달렸다. 차별주의자의 정체성 정치가 위험한 것은 바로 존재의 중첩된 가능성을 봉쇄해 그 사회의 역동성을 폐쇄하기 때문이다. 반차별 운동은 이 가능성을 해방하고 사회에 역동성을 다시 부여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이미 ‘사회적’ 운동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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