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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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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최연소 부패 대통령

엘살바도르 내전과 미국 국제 전략 속에서 승승장구한 프란시스코 플로레스… 백색테러 리더 추종하고 퇴임 뒤 부정축재로 기소
등록 2016-02-17 17:48 수정 2020-05-03 04:28

아메리카의 북과 남을 잇는 가느다란 대륙의 줄기에 엘살바도르가 있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각각 과테말라, 온두라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그마한 태평양 연안국가다. 2014년을 기준으로 630만 명 남짓한 인구가, 미국의 매사추세츠주 정도의 땅덩어리에 살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중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2015년 말을 기준으로 엘살바도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4022달러다. 1987년과 1988년 무렵 한국이 그랬다. 그럼에도 국민의 40% 안팎이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빈부 격차가 심하다는 뜻이다. 세계은행의 자료를 보면, 2013년을 기준으로 상위 10%가 엘살바도르 전체 소득의 34.4%를 점하고 있다.
핏빛 내전 타고 정치권 진입
1979년 10월 엘살바도르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거리로 몰려나온 항의 시위대는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5개 좌파단체가 연대해 무장조직을 결성했다.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하 해방전선), 1920~30년대 농민해방 투쟁을 주도한 혁명가 아우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 로드리게스의 후예를 자처한 게다. 엘살바도르는 1980년부터 핏빛 내전으로 빨려들었다.
미 의회조사국(CRS)이 2013년 4월 펴낸 자료를 보면, 1980년대 엘살바도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대외 원조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였다. 집권세력이 12년여에 걸친 내전을 버텨낸 것도 미국의 힘이었다. 1992년 1월 유엔의 중재로 멕시코시티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줄잡아 7만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인구의 약 1.4%에 해당한다. 프란시스코 플로레스의 정치적 부상은 이 무렵 본격화했다.
프란시스코 귀예르모 플로레스 페레스는 1959년 10월17일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64km 떨어진 제2대 도시 산타아나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유한 농장주였고, 아버지(경제학)와 어머니(민속학)는 학자였다. 그는 여느 부유층 자제와 마찬가지로 산살바도르의 에스쿠엘라 아메리카나(미국 국제학교)에 다니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부인 로르데스 로드리게스를 만난 것도 그곳이다.
고교를 졸업한 플로레스는 1977년 미국으로 건너가 코네티컷의 하트포드대학을 거쳐, 매사추세츠의 암허스트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한때 명상에 심취해 인도 철학자 스리 사티야 사이바바가 캘리포니아에 세운 비인가 교육기관인 월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다니기도 했다. 이후 하버드대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비학위 과정으로 철학·법학·경제학 과목을 수강하던 그는 1983년 귀국한다. 가 1999년 3월9일 보도한 내용을 보면, 내전 기간 동안 플로레스는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농장에 머물며 마을 사람들에게 철학 강의를 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1989년 3월 치러진 대선에서 우파 민족공화연맹(ARENA·이하 아레나) 후보로 나선 기업가 출신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가 당선됐다. 아레나의 첫 번째 집권이다. 그는 최측근이자 우파 이론가인 호세 안토니오 로드리게스를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그해 6월1일 취임식이 열렸다. 그로부터 불과 9일 만에 로드리게스가 출근길 집 앞에서 암살됐다. 크리스티아니 대통령은 숨진 로드리게스의 사위를 경제기획부 차관으로 발탁했다. 채 30살이 안 된 플로레스였다.
이듬해 정무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플로레스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92년 평화협정 체결과 뒤이은 제헌헌법 초안 작성에 간여하기도 했다. 이어 1994년 3월 총선에서 의회에 진출하면서 일약 중량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크리스티아니의 뒤를 이어 같은 당의 아르만도 칼데론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플로레스는 공보장관에 임명됐다. 이어 1997년엔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그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권력의 핵심을 향해 내달렸다.
39살에 대통령 돼 미국 이해 앞장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8년 3월 아레나는 당내 ‘온건파’로 알려진 플로레스를 후보로 내세웠다. 이듬해 3월 치러진 대선에서 그는 무난히 당선됐다. 그의 나이 39살, 당시 라틴아메리카 국가수반 가운데 최연소였다. 대선 승리가 확정됐을 때, 그는 몰려든 지지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 당을 창당하신 분의 가치를 잊지 맙시다! 로베르토 다우뷔손의 정신을 기억합시다!”
다우뷔손이 누군가? 내전 초기 육군 소령 계급장을 달고 백색테러를 주도했던 자다. 그는 1980년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 암살의 배후로 악명이 높다. 1981년 그가 창당한 아레나는 단박에 의회를 장악했다. 1984년 대선에 도전했다 실패한 뒤 막후로 물러난 다우뷔손은 47살이던 1992년 식도암으로 숨졌다. 그해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총을 내려놓은 해방전선은 정당으로 탈바꿈해 정치권으로 진입했다. 이후 미국의 관심은 ‘보수 본류’인 아레나의 집권을 연장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플로레스의 급부상도 이런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집권 5년 동안 플로레스는 크게 세 가지 ‘업적’을 남겼다. 첫째,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앞장서 파병을 결정했다. 둘째, 미국과 중미 각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데 적극 나섰다. 셋째, 자국 화폐 ‘콜론’을 버리고 미국의 달러화를 공식 화폐로 바꿨다. 세 번째 ‘업적’에 대해선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1년 6월 펴낸 자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달러화를 받아들인 이후 엘살바도르의 거시경제 지표가 상당 부분 개선됐다. 물가는 안정적으로 관리됐고, 경제도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했다. 공공부채 비율도 낮은 상태에 머물렀으며, 금융권도 외부 충격으로 인한 혼란을 겪지 않게 됐다.”
플로레스는 집권 2년차를 맞아 달러화 도입을 뼈대로 한 ‘화폐통합법’ 추진 의사를 밝혔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공식 발표로부터 단 39일 만에 법안이 통과됐다. 엘살바도르 공식 화폐는 2001년 1월1일부터 달러화로 바뀌었다. 통화를 달러화로 바꾸는 정책은 살인적인 물가상승률과 재정·금융 위기에 빠진 국가에서 주로 선택하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실제 60%를 웃도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곤욕을 치르던 에콰도르는 1999년 달러화로 옮겨갔다. 엘살바도르는 어땠을까?
1990년대 엘살바도르의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5% 남짓에 머물렀다. 대외채무 역시 국내총생산의 23%에 그칠 정도로 라틴아메리카 평균치를 밑돌았다. 외화도 안정적으로 유입됐다. 2001년을 기준으로 150만 명을 넘는 미국 거주 이주노동자들이 보내오는 송금액만 한 해 19억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달러화로 갈아탈 급박성은 찾기 어렵다. 중남미 전문가 마르시아 타워·실비아 보르주츠키는 2004년 에 기고한 ‘엘살바도르 달러화의 사회·경제적 파장’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달러화 채택은 경제적 측면이 아닌 정치적 측면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내전 종식 이후 엘살바도르 서민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토지 소유와 소득 분배의 불평등성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엘살바도르의 전국경제인연합회 격인) 전국민간기업협회(ANEP)가 경제 전반을 장악한 상태에서, 거푸 집권에 성공한 아레나는 소수 기득권층의 이해만 대변했다. 대중적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했다. …달러화 채택은 친미 엘리트 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권력과 지위, 소득과 자산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한 조치일 뿐이다.”
2004년 3월 대선에서도 아레나 소속 안토니오 사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로써 아레나는 연속 20년 집권이 가능해졌다. 퇴임을 앞둔 플로레스는 미주기구(OAS) 사무총장에 도전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미국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점이 되레 족쇄가 됐다. 미주기구 발족 이래 미국이 지원한 후보가 사무총장에 선출되지 못한 것은 플로레스가 처음이다.
지진 구호기금 착복
2009년 1월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해방전선은 49.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함께 치러진 총선에선 의회 다수당이 됐다. 두 달 뒤가 대선이었다. 아레나는 경찰총수 출신 로드리고 아빌라를, 해방전선은 언론인 출신 모리시오 푸네스를 후보로 내세웠다.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는 단 2%, 해방전선의 승리였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엘살바도르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세로 돌아선 것이 해방전선의 첫 집권을 측면에서 거들었다. 미국과 경제를 밀착시킨 플로레스의 ‘공’일까? 아레나는 2012년 3월 총선에서 의회 다수당 지위를 회복했지만, 2014년 대선에서 게릴라 출신 산체스 세렌이 당선되면서 해방전선은 집권을 이어갔다. 한동안 잊혀졌던 플로레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달러화가 공식 화폐로 등장한 2001년 1월 엘살바도르에서 진도 7.6의 강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944명이 숨지고, 5565명이 다쳤다. 10만8천여 채의 가옥이 붕괴됐다. 피해 복구는 더디기만 했다. 미국을 따라 유엔에서 편을 들어준 것을 고맙게 여긴 대만 정부는 2003년 구호자금 1500만달러를 플로레스 정부에 전달했다. 이 돈이 사라졌다는 점이 확인됐다. 플로레스는 “모두 정당하게 분배됐다”고 강변했지만, 의회 조사 결과는 사뭇 달랐다. 1천만달러는 아레나의 금고에서, 500만달러는 플로레스의 계좌에서 발견됐다.
플로레스는 2014년 10월부터 가택연금 상태로 수사를 받게 됐다. 2015년 12월3일엔 횡령과 부정축재 혐의로 기소됐다. 퇴임 뒤 부패 혐의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은 그가 처음이다. 지난 1월25일 플로레스는 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뇌출혈이었다.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닷새 뒤 숨을 거뒀다. 향년 56.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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