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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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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가장 존경한 ‘위대한 소수자’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
해방 노예의 손자에서 ‘평등 수호’ 선봉장으로
등록 2016-01-27 07:04 수정 2020-05-02 19:28

88회째를 맞는 올해 아카데미영화상(오스카상) 시상식은 2월28일 오후 5시(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의 돌비 극장에서 열린다. 시상식에 앞서 지난 1월14일 24개 부문에 걸친 수상 후보자가 발표됐다. 연기자가 탈 수 있는 상은 남녀 조연·주연상 4개 부문이다. 각 부문 별로 5명씩, 20명이 후보자로 선정됐다. 20명 모두 ‘백인’이었다. 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2년 연속 연기상 후보자에 단 1명도, 이른바 ‘유색인’이 없었다.
상원의원 오바마 집무실 벽에 걸린 얼굴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OscarsSoWhite.’(오스카상은 지나치게 백인 중심적이다.) 후보자 발표 직후부터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보이콧’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연기자 부부인 윌 스미스·제이다 핑킷 스미스를 필두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연기자들이 시상식 불참을 선언했다. 스파이크 리·마이클 무어 등 유명 감독들도 잇따라 불참 뜻을 밝혔다. 원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은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예해방으로 이어진) 남북전쟁이 끝난 지 150여 년이 흘렀지만, 미국에선 여전히 ‘잠재적 인종주의’가 만연해 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숱한 젊은 흑인 남성들이 거리에서 경찰의 총에 맞고 죽어가는 게 더 큰 문제다.”
1월 셋쨋주 월요일, 지난 1월18일은 미국의 연방 공휴일이었다.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 격인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생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날이다. ‘킹 목사의 날’, 1986년 공휴일로 지정됐으니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20일 취임했다.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집권 8년째를 맞았음에도, 미국은 인종차별의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흑인 남성은 1134명에 이른다. 사상 최악이다. 세상,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은 초선 연방 상원의원 시절인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공화당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그해 8월12일 은 두 후보의 의원실을 비교해 보도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오바마 의원실에는 ‘영웅의 벽’이 마련돼 있었다. 벽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존 케네디 대통령과 킹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킹 목사가 ‘내겐 꿈이 있습니다’란 연설을 한 1963년 워싱턴 행진 당시 행사 일정표 원본과 1965년 앨러배마주 셀마에서 열린 민권운동 행진을 표지 기사로 다룬 잡지 사본도 액자에 담겨 있었다.
다른 쪽 벽면엔 어머니의 유해를 태평양 바다에 뿌린 고향 하와이의 절벽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바로 곁에 의원실에서 가장 큰 액자가 걸려 있다. 화가 채즈 게스트가 유화로 그린 초상화다. 주인공은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법관이다. 변호사이자 헌법학자인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는 서굿 마셜이다.
서굿 마셜은 1908년 7월2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철도 하역노동자 출신인 아버지는 백인 전용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어머니는 교사였다. 그의 조부는 ‘해방된 노예’였다. 콩고 땅에서 태어난 증조부는 노예상한테 붙잡혀 메릴랜드주로 팔려왔다.

사회 바꾸는 엔지니어를 꿈꾸며
어린 마셜은 ‘악동’으로 유명했다. 마셜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선생님은 벌로 헌법 조문을 외우도록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헌법을 외우다시피 하게 된 마셜은 법률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도망 노예’ 출신인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이름을 딴 고교에 진학한 마셜은 옷 배달을 해 학비를 벌었다. 링컨대학 재학 중에는 웨이터로 일하며 학자금을 댔다. 대학 시절에도 ‘악동’ 기질은 여전해서, 동료 학생을 괴롭힌 일로 한 차례 퇴학 처분을 받기도 했단다.
그가 처음 민권운동에 발을 들인 건 대학 2학년 때다. 그는 동네 극장에서 흑인과 백인의 좌석을 분리한 것에 항의해, 친구들과 연좌농성을 벌였다. 대학에 복교한 뒤에는 탁월한 토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930년 우등으로 졸업장을 따냈다. 애초 마셜은 메릴랜드주립대 로스쿨 진학을 희망했다. 하지만 피부색을 이유로 입학이 불허됐다. 그는 흑인 고등교육기관으로 이름난 워싱턴의 하워드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메릴랜드주립대는 나중에 로스쿨 도서관을 마셜의 이름을 따 헌정한다.
어머니의 약혼·결혼 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입학금을 마련해 진학한 로스쿨에서 그는 평생의 스승을 만난다. 명문 하버드대학 로스쿨 출신으로 연방대법원에서 승소한 첫 흑인 변호사인 찰스 해밀턴 휴스턴이었다. 당시 로스쿨 부학장이던 휴스턴은 학생들에게 ‘법은 제도화한 인종차별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무기’라고 가르쳤다. 마셜은 1992년 와 한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변호사가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엔지니어가 되라고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인종분리가 당연시되던 때다.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한 존재’란 주장은 그저 관념이 아니라 엄혹한 현실이었다. 젊은 마셜에겐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위한 ‘상상력’이 절실했다. 1933년 로스쿨 졸업과 함께 고향에서 개업했던 마셜은 1936년 휴스턴의 권유로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에 딸린 법률구조 및 교육기금으로 자리를 옮겼다. 휴스턴의 뒤를 이어 마셜이 사무총장으로 활약하면서, 이 단체는 미국에서 가장 유력한 공익 소송단체로 자리잡게 된다.

‘인종 평등’ 확립 위한 법적 노력
“당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라. 법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마셜이 평생 신조로 삼은 경구다. 정치권이 요지부동이던 시절,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건 법뿐이었다. 20여 년에 걸친 공익변호사 기간 내내, 마셜은 인종평등을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노력에 매진했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올리버 브라운 대 캔자스주 토피카 시교육위원회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까지 미국 21개 주에선 ‘평등하지만, 분리해서 교육한다’는 법 규정을 두고 있었다. 변론을 맡은 마셜에게 펠릭스 프랭크푸르터 대법관은 ‘평등’의 의미를 물었다. 마셜은 이렇게 답했다. “같은 것을,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받을 수 있는 게 바로 평등입니다.” 미 대법원은 1954년 5월17일 전원일치로 ‘인종 간 분리 교육을 명문화한 주 정부 법률은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공익소송 분야에서 성가를 이어가던 1961년 마셜은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그의 활동을 눈여겨본 존 케네디 대통령이 공석이 된 연방 항소심 법원판사로 그를 지명한 게다. 상원에선 남부 출신 의원들이 그의 인준청문회를 질질 끌었다. 그는 인준도 받지 못한 채 ‘비상임’ 형태로 연방판사 업무를 시작해야 했다.
연방법원 재직 시절 마셜이 내린 판결은 단 1건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지 않았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5년 그를 송무 담당 법무차관에 임명했다. 유력한 차기 대법관 후보자가 거치는 자리다. 그는 정부를 대표해 대법원에서 32건의 사건을 다퉜고, 그 가운데 29건에서 승소했다. 1967년 톰 클라크 대법관이 자진 퇴임했다. 존슨 대통령은 마셜을 후임으로 지명했다. 1967년 10월2일 마셜은 대법관으로 취임했다. 미 대법원 역사상 96번째이자, 사상 첫 흑인이었다.
대법관 시절 마셜은 ‘위대한 소수자’로 불렸다. 바야흐로 민권운동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미국 사회가 보수화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는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최전선에서 숱한 소수의견을 남겼다. ‘리치먼드 시정부 대 카슨 사건’(1989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시정부는 공공계약 물량의 30%를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이 운영하는 회사에 할당하도록 하는 ‘소수인종 보호법’(Affirmative Action )을 두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백인 기업인 에이제이 카슨이 ‘역차별’이라며 소송을 낸 게다. 대법원은 6 대 3으로 카슨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마셜은 소수의견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대법원의 다수는, 인종차별이 과거에나 존재했던 현상으로 여기고 있다. 지방정부가 인종차별을 막기 위한 보호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인종차별 근절 근처에도 가지 못한 상태다.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미국 사회를 헌법적으로 규정해버린 게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차별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것임은 물론 인종차별 문제를 극도로 세심하게 다뤄온 대법원의 전통에도 반한다.”
숱한 소수의견으로 차별 맞서
마셜은 1991년 10월 대법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인 1992년 11월 대선에서 빌 클린턴 아칸소주 주지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2년 만에 민주당이 백악관을 탈환한 게다. 부통령 후보였던 앨 고어는 마셜에게 취임선서 집전을 부탁했다. 취임식은 1993년 1월20일 치러졌다. 마셜은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나흘 뒤인 1993년 1월24일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향년 84.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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