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 부근에 살면 지구의 자전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1년 내내 정각 6시에 해가 지는데, 그 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10분 만에 사위가 깜깜해진다.
남자카르타의 블록엠은 해가 지면 생기를 띠는 유흥가다. 일식당과 일본식 선술집이 모여 있는 일본인 거리이기도 하다. 일본 슈퍼마켓 ‘파파야’ 모퉁이를 돌면 ‘자혜’(지케이)라는 작은 일본 술집이 나온다. 이 이상한 이름의 술집에선 항상 대머리 일본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술집 뒷방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현관 앞에는 긴 바가 있고 그 위에 낡은 브라운관 모니터가 하나 있다. 거기선 찍은 지 30년은 됨직한 뮤직비디오와 낡은 일본 노래 반주가 흘러나온다. 늙수그레한 손님들이 바에 앉아 마이크로 노래를 부른다.
‘자혜’의 주인 사치코 할머니는 자기 가게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한다. 한번 마이크를 들면 서너 곡이 기본인데, 사실 듣기 곤혹스럽다. 음치에 가까운데다 목소리마저 카랑카랑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노래가 길어지면 빨리 취해 고막을 마비시키는 게 좋다.
사치코 할머니는 1943년 11월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혜’라는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였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1962년 도쿄의 대학생 댄스파티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거기서 그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인도네시아국립대학(UI) 공학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열애 끝에 그는 부모님 몰래 자카르타로 가서 이슬람으로 개종까지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기모노를 입고 결혼식을 치렀어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보더군요.”
결혼한 뒤에도 사치코 할머니는 집안의 만류 때문에 8년이나 도쿄에 살았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자 자카르타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했어요. 가끔 찾아오는 아빠 말고요. 부모님이 많이 슬퍼하셨죠. 자꾸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헷갈리셨어요.”
1972년 자카르타로 간 사치코 할머니는 힘들게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 이주 초기에는 남편이 자리잡을 때까지 호텔과 하숙집을 전전해야 했다. 간신히 안정을 찾을 무렵, 엘리트인 남편의 인맥을 활용해 특혜를 따달라는 일본 기업들의 유혹이 시작됐다.
인도네시아의 일본인 여성 로비스트는 유명한 전례가 있다.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 하타 대통령의 넷째 부인이 나오코(인도네시아 이름 ‘데위’)라는 이름의 일본인이었는데, 인도네시아의 기간산업을 일본에 넘겨준 로비스트이기도 했다. 나오코의 남동생은 누나가 수카르노의 ‘첩’이 된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사실 이 결혼은 일본의 치밀한 작전이기도 했다. 사치코 할머니도 제안을 받자마자 나오코를 떠올렸다. 그러나 거액의 보상금이 약속된 로비스트의 길을 수락할 순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일식집이 하나둘 늘어가던 블록엠에 술집을 차렸다. 그 술집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의 이름을 붙였다. 인도네시아의 국부를 일본에 빼돌리는 대신, 그는 갈 데 없는 일본인들의 밤을 위로했다. 이 술집은 30년이 지나도록 타임캡슐처럼 구닥다리 스타일을 유지했다. 일본인 이민 1세대가 대부분인 단골들은 머리가 벗겨지고 주름이 깊어져도 이곳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우리 술집에서 사람들이 위로받는 게 좋아요. 그렇다고 일본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에요. 한번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 없어요. 나는 인도네시아인이고 여기 자카르타에서 죽을 거예요.”
이 말을 마치고 사치코 할머니는 생전 처음 듣는 낡은 일본 노래를 시작했다. 손님들이 노래를 따라불렀다. 그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듣기 괴로워 자기 목소리로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들렸다. 할머니의 앙코르곡이 시작되자 나는 술집을 빠져나왔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유현산 소설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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