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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나도 따라다녀볼까

칠레 생활 3년째, ‘양키문화’ ‘상술’ 비판 아랑곳없이 ‘핼러윈 파티’에 급속도로 적응해가는 딸
등록 2014-11-21 16:08 수정 2020-05-03 04:27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이제 10번째가 넘었다. 10월31일 칠레 산티아고, 허수아비 유령 그림을 붙여놓은 우리 아파트는 핼러윈 파티 꼬마 손님들을 맞았다.
며칠 전부터 관리실에서 아파트 곳곳에 핼러윈 안내문을 붙였다. 1. 시간은 저녁 8시~밤 10시 2. 풍선 등을 붙여서 참가하겠다는 집에만 사탕을 달라고 할 것 3. 어린이는 부모가 동행할 것 4. 촛불 등은 화재 위험이 있으니 켜지 말 것 5. 벽에 낙서를 하지 말 것 등이다.

아이들이 핼러윈을 맞아 집 앞에서 변장을 한 채 사탕을 달라고 하는 모습(왼쪽). 딸이 모아온 알록달록한 사탕이 바구니에 가득하다. 김순배

아이들이 핼러윈을 맞아 집 앞에서 변장을 한 채 사탕을 달라고 하는 모습(왼쪽). 딸이 모아온 알록달록한 사탕이 바구니에 가득하다. 김순배

9살 난 딸도 며칠 전부터 신났다. “파울리나 언니랑 파비올라랑 같이 다니면서 사탕을 달라고 할 거야. 아빠, 그래도 되지?” 칠레에 온 뒤 세 번째 맞는 핼러윈이다. 첫해는 갑자기 아이들이 초인종을 눌러대서 무슨 일인가 놀랐다. 마침 집에 있던 사탕을 하나씩 줬지만, 뒤늦게 우리도 해보자고 해도 딸은 싫다고 했다. 지난해는 아이의 같은 반 친구네가 초대해서, 그 주택 단지를 동네 아이들과 줄지어 돌며 사탕을 받았다. 딸은 마녀 옷을 걸치고 마녀 모자를 썼다. 그리고 세 번째 해인 올해는 아이가 친구들과 계획을 세웠다며 먼저 말한 것이다.

나는 미리 사탕 세 봉지, 5천원어치를 샀다. 저녁 8시가 갓 넘어서자 귀신, 괴물, 배트맨, 공주… 친구끼리, 아빠랑, 엄마랑… 둘이서, 7~8명이서…, 줄줄이 다녀갔다. 사탕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사탕이 다 떨어질 무렵, 딸이 자랑스레 들고 온 수북한 사탕 바구니에서 몇 개씩 꺼내 아이들에게 건넸다. 딸이 막대사탕은 절대 못 준다고 뺐다. 밤 10시10분께 마지막 초인종이 울렸다. 아빠가 자기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고 3살짜리 아들이 울어댔다.

초인종이 울리는 사이사이 뉴스를 봤다. 다음날인 11월1일은 ‘모든 성인의 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을 하루 먼저 찾았단다. 묘지의 꽃값도 덩달아 올랐다. 또 귀신들이 모인다고 믿는 신비한 동네가 있다는 소식과 핼러윈이 갈수록 상업화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칠레에 핼러윈 파티가 들어온 건 약 10년 전, 보편화된 건 얼추 5년 전이라고 한다. 이웃 후안은 “우리 전통이랑 전혀 상관없는 그링고(양키) 문화가 들어와서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1997년 멕시코에서 맞았던 ‘사자의 날’,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은 무척 라틴아메리카적이었다. 아내가 한국에서도 핼러윈 파티가 늘고 있는데 상술이라며 욕도 먹는다고 했다.

곳곳의 성당은 갈수록 텅텅 빈다. “칠레의 변화는 세속화, 소비주의라는 종교의 득세”라는 후안의 해석이 그럴듯하다. 11월1일치 신문을 펴니,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물 판매 광고책자가 잔뜩 들어 있다.

암튼 참 잘 논다, 가족끼리. 아내는 아이들 따라 부모가 다니면서 같이 즐기고 사진도 찍어주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단다. 내년에는 나도 아이를 따라다녀볼까? 1만원짜리 마녀 복장은 내년에도 쓰면 된다.

식탁 위에 아이가 모아온 사탕이 가득하다. 내 돈으로는 절대 사주지 않을 온갖 알록달록한 색소와 설탕이 범벅된 사탕들이다. ‘아빠, 이것 봐’ 하며 딸이 보여주는데, 사탕을 먹은 뒤 혓바닥이 뻘겋다. 저걸 다 어쩐다. 어디 슬쩍 조금씩 버릴까?

산티아고(칠레)=김순배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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