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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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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성전의 표적이 되다

등록 2013-12-21 14:23 수정 2020-05-03 04:27

1988년 4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발표한 소련은 9개월 만인 1989년 초가 되자 철군을 완료했다. 아프간 전쟁은 김빠진 사이다가 됐다. 외국인 무자헤딘들의 전진기지인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는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지하드 투쟁을 벌이자는 노선은 이 시기 알카에다의 결성과 오사마 빈라덴의 주도권 장악에서 잘 드러난다. 1984년부터 ‘서비스 오피스’(아랍어 약자로 MAK)를 결성해 외국인 무자헤딘 모집과 훈련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사마 빈라덴과 압둘라 아잠은 MAK를 알카에다라는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아랍어로 ‘기초’ 혹은 ‘기반’이라는 뜻의 알카에다의 결성 시기는 1988년 8월부터 1989년 말 사이로 추정된다. 1988년 8월이면 빈라덴이 향후 지하드 노선 투쟁에서 MAK의 1인자인 아잠을 누르기 시작한 때다.

이란 견제하려 이라크와 밀월한 미국

1990년 8월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해 하루 만에 점령해버렸다. 5개월 뒤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탈환하고 이라크까지 진공하는 ‘사막의 폭풍’ 작전까지 이어지는 이 걸프전은 이슬람 세계를 찢어놓은 또 하나의 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랍의 대의나 이슬람의 대의에 형식적으로나마 대오를 맞추려 했던 아랍의 각 국가 사이의 연대는 붕괴됐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지하디스트 세력들은 걸프전에서 미국과 공조한 이슬람 세계의 기존 정권들과 완전히 결별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왕정과 빈라덴의 관계에도 파국을 가져왔다.
걸프전의 뿌리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뒤인 1980년 9월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전격적으로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과 오랜 국경분쟁을 겪던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의 시아파 주도 이슬람 혁명이 이라크에서 소외된 다수파 시아파 주민에게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반혁명 예방전쟁을 도발했다. 1988년 8월까지 지속된 이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긴 국가 간 재래식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걸프전을 낳고, 걸프전은 2000년대 이라크 전쟁을 배태하고, 이라크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는 이라크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은 1차 이라크 전쟁, 걸프전은 2차 이라크 전쟁, 이라크 전쟁은 3차 이라크 전쟁, 이라크 내전은 4차 이라크 전쟁이다.
전쟁은 1982년 8월부터 이란의 공세가 지속되는 국경지대에서 길고 긴 참호전의 양상을 보였다. 이라크를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하는 등 적대적 관계였던 미국은 태도를 바꿔 이라크 지원에 나섰다. 병참과 비전투 항공기까지 지원하던 미국은 이란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라크와의 국교 수립에도 나섰다. 이라크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즈펠드를 특사로 파견해, 사담 후세인과 직접 만나 관계 개선을 논의하도록 했다. 도널드 럼즈펠드는 20년 뒤 조지 W. 부시 대통령 밑에서 다시 국방장관으로 임명돼 이라크 전쟁의 주역이 된다. 럼즈펠드는 자신의 회고록 (Known and Unknown)에서 후세인과의 회담은 “사반세기 동안 가십과 루머, 터무니없는 음모론의 대상이 돼왔다”며 “나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비밀 석유 거래, 이라크에 대한 무기 지원, 이라크가 미국의 의존국가가 될 수 있는지 등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됐다. 우리의 대면이 극적이었다기보다는 간단명료했다는 것이 진실이다”라고 해명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 8월 유엔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맺고 8년 만에 끝났다. 모두 125만 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후세인 정권은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혁명을 막기 위해 총대를 메었지만, 사우디와 쿠웨이트로부터의 빚 독촉만 남았다. 이라크의 유일한 국가 재정원인 석유 가격은 바닥을 기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이 석유수출국기구(OPEC) 쿼터를 어기고 석유를 과잉 증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두 나라의 국경지대에서 석유를 채굴하면서, 자신들의 루마일라 유전 석유까지 빨아들여 절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담, 미국의 의도 오판하다

1990년 7월31일 사우디 제다 회의에서 이라크는 루마일라 유전 석유 문제에 대한 배상으로 100억달러를 요구했고, 쿠웨이트는 90억달러를 제시했다. 밀고 당기기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라크는 이틀 뒤인 8월2일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예상을 뒤엎은 이라크의 침공에는 미국의 모호한 태도가 작용했다는 지적이 있다. 제다 회의에 앞서 7월25일 사담은 에이프릴 글라스피에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를 만났다. 글라스피에 대사는 “우리는 쿠웨이트와 당신들의 국경분쟁 등 아랍 국가 사이의 분쟁들에 대해 입장이 없다… 솔직히 우리는 당신들이 남쪽에 거대한 병력을 배치한 것을 알고 있다. 보통 그런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나중에 글라스피에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이 임박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아랍 문제에 대한 입장이 없다고 말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사담은 오판했다. 쿠웨이트 침공 몇 시간 만에 미국은 전례 없는 신속한 강경 대응을 주도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즉각 소집하고, 이라크의 즉각적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을 시작으로 대응에 나섰다. 최대 우려는 사우디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이었다. 사담은 미국이 지원하는 사우디 국가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불법적이고 가치 없는 수호자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으로 이라크군은 사우디의 유전지대를 쉽게 타격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됐다.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카터 독트린에 입각해 작전명 ‘사막의 폭풍’이라는 “전적으로 방어적인” 사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카터 독트린은 1980년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걸프 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면 군사력도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한 정책이다. 사막의 폭풍 작전은 8월7일 사우디 국왕 파드의 요청에 따라 미군을 사우디에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사막의 폭풍 작전은 하루 만에 공격형으로 바뀌어 사우디에 대한 미군의 배치가 가속화됐다. 미군 전투기가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1시간 거리인 알카르지 공군기지에 배치되는 것을 시작으로 속속 미군이 증파됐다. 나중에 한국도 비전투요원 파견으로 가세한 다국적군은 모두 54만3천 명으로 늘어 사우디와 그 주변에 배치됐다. 이미 미국에 대해 칼을 갈고 있던 아프간전 참전 아랍의 무자헤딘 세력 등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성지가 있는 사우디에 불경한 외국 세력의 우두머리인 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서방 점령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빈라덴과 사우디 왕가의 결별

대표적인 인물이 빈라덴이다. 알카에다를 결성하고 아프간을 넘어서는 지하드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던 빈라덴은 당시 사우디의 고향 제다에 가족을 재정착시킨 뒤 파키스탄을 오가고 있었다. 그는 아프간전에 참전한 사우디 및 예멘 출신 무자헤딘을 모아 남예멘의 친소 사회주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새로운 지하드를 계획 중이었다. 동분서주하던 빈라덴에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아프간 전쟁에 비견되는 지하드를 벌일 수 있겠다는 야망을 키우게 했다. 그는 제다에서 학교와 집회를 찾아다니며 정의로운 이슬람주의 자원병 부대를 조직해 사담 후세인을 격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연설했다. 특히 그는 미군을 초청한 사우디 왕가의 결정에 격렬히 반대했다.
빈라덴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사우디 왕가의 한 왕자는 친정부 이슬람 신학자 칼릴 A. 칼릴을 대동하고 제다로 가서 그의 의견을 청취했다. 빈라덴은 “이라크에 대한 게릴라전을 수행하고자 한다”며 파드 국왕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칼릴이 병력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그는 “6만 명이고, 또 2만 명의 사우디 자원병이 있다”고 과장했다. 왕자는 파드 국왕과는 만날 수 없다며 대신 사우디 국방부와의 만남을 주선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경고했다. “당신은 지금 법과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으로 만난 사람을 체포하는 것은 우리의 관습이 아니다. 내 충고는 당신 자신을 사려 깊게 살피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과 당신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자 빈라덴은 응수했다. “당신들은 주인인 미국의 말을 듣고 있다. 나는 이슬람 군대의 사령관이다.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않는다. 나는 오직 알라만을 두려워한다.”
빈라덴은 리야드의 국방부를 방문해 다시 한번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국방장관인 술탄 왕자는 그의 계획이 실현될지 의문을 표했다. “쿠웨이트에는 동굴이 없고, 당신들은 산악이나 동굴에서 이라크군과 싸울 수 없다. 사담이 생화학무기를 실은 미사일을 당신들에게 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빈라덴은 “우리는 신앙으로 싸울 것”이라고 응답했을 뿐이다. 만남은 정중하게 끝났으나, 이는 빈라덴의 인생에 분수령이 됐다고 사우디 정보기관 총정보국의 수장 투르키 왕자는 회고했다.
사우디 왕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아프간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압둘 라술 사야프 등 이슬람주의 무자헤딘들도 사우디를 격렬히 비난했다. 사야프는 페샤와르에서 공개 강연을 통해 사우디 왕가는 반이슬람이라는 충격적인 비난을 했다. 아프간 무자헤딘 지원의 주역인 총정보국 수장 투르키 왕자는 비서실장 아메드 바디브를 파키스탄으로 파견했다. 그는 공식 모임에서 사우디 왕가를 공개 비난하던 사야프와 만났다. 바디브는 “당신이 말한 것을 정말로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며 “너와 네 가족, 아프간 모두 엿이나 먹으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냉전시대의 지하드 동맹을 엮었던 끈들이 산산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슬람권에 번지는 내전의 불길

1991년 4월 빈라덴은 파키스탄에서 열리는 이슬람 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출국했고, 다시는 조국 사우디로 돌아오지 못한다. 빈라덴 쪽은 이 출국이 사우디 왕가의 반체제 인사의 도움으로 망명한 것이라 주장하고, 사우디 정부 쪽은 빈라덴을 배려한 조처였다고 설명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빈라덴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그를 보호하려고 출국시켰다는 것이다. 망명길에 나선 빈라덴은 1980년대 말부터 인연을 맺었던 수단의 하산 알투라비 이슬람주의 정부의 요청과 배려로 수단에 근거지를 차린다.
소말리아에서는 기존 정권이 무너져 기나긴 무정부 상태의 내전이 시작됐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주민들의 인티파다가 4년째 계속되며 하마스 등 이슬람주의 세력이 성장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이 되자 알제리에서는 이슬람주의 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군부에 의해 무효화되며 잔인한 내전에 들어간다. 빈라덴과 알카에다도 수단에서 조직 정비를 완료한 뒤 행동에 나선다.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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