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0일 캐나다 퀘벡주의 신임 주정부는 대학 지원금 삭감과 등록금 인상 계획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대학가의 시위와 집회를 규제하는 주법률 제12호도 폐지하겠다고 공표했다. 이것은 모두 전임 자유당(PL) 정부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던 정책들이다. 하지만 9월4일 퀘벡 총선으로 권력이 퀘벡당(PQ)으로 넘어가 이 정책들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정책이 확 바뀌었을 뿐 아니라 사람도 크게 바뀌었다. 퀘벡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이 주지사(영국 왕이 임명하는 ‘주지사’가 따로 있지만 실제 행정 수장은 주의회 다수당 대표가 맡는다)가 되었다. 바로 퀘벡당 대표 폴린 마르와다. 이런 결과들을 놓고 보면, 선거 하나로 참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등록금 인상폭, 43년간 300%
그런데 잘 살펴봐야 할 게 있다. 대학 등록금 인상 철회는 이번 선거만의 쟁점은 아니었다. 퀘벡당이 독자적으로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정권 교체로 등록금 인상을 막기까지는 선거 이전의 기나긴 대중운동이 있었다. 퀘벡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이다. 이 투쟁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극적인 모습으로 부활한 전세계 학생운동 중에서도 영국·칠레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사례로 주목받았다. 이 투쟁이 없었다면 선거를 통한 정책 전환도 없었을 것이다.
투쟁의 발단은 퀘벡에서도 정부 재정 문제였다.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퀘벡 정계에는 균형재정 원칙이 마치 신앙처럼 뿌리내렸다. 그러던 차에 금융위기가 닥쳤고, 이로 인해 주정부 재정이 압박을 받게 되었다. 장 샤레스트의 자유당 정부는 다른 집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복지 지출 축소로 해결하려 했다. 예산 삭감의 가위질이 시작됐고, 이 가위질의 첫 번째 대상으로 대학 지원금이 지목됐다.
퀘벡의 교육예산은 어떤 이들에게는 자랑거리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골칫거리다. 1960년대의 이른바 ‘조용한 혁명’으로 복지제도가 정착된 퀘벡에서는 1968년부터 1990년까지 20여 년간 대학 등록금이 연간 540달러로 동결됐다. 이후 몇 차례 인상을 거쳐 현재는 연간 2168달러다. 1968년부터 43년간의 인상폭이 300%다. 이는 같은 기간의 물가인상률 557%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등록금으로 다 충당하지 못하는 대학 예산은 주정부 지원금으로 메워왔다. 덕분에 퀘벡은 캐나다에서 대학 등록금이 가장 싼 주가 되었다. 퀘벡 대학생들은 학비의 10%만 자비로 부담하면 되었다. 이 액수는 캐나다 다른 주의 대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복지 퀘벡의 상징과도 같은 이 대학 시스템이 자유당 정부에는 예산 낭비의 큰 구멍으로만 보였다. 샤레스트 지사는 이 전통에 손대기로 결심했다. 그는 연초에 2017년까지 대학 등록금 본인 부담분을 3793달러로 1천달러 훨씬 넘게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장학금 지원 대상을 확대하고 등록금 대출 상환 기간을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퀘벡에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대대적인 등록금 인상 조처라는 것은 분명했다.
30만명 학생시위, 50만명 연대시위
자유당 정부는 이 방안을 놓고 학생 조합들과 협상했다. 퀘벡의 주요 학생 조합들로는 12만 명 규모의 퀘벡종합대학학생연맹(FEUQ), 8만 명 규모의 퀘벡단과대학학생연맹(FECQ), 그리고 10만 명 규모의 ‘교육조합 연대를 위한 대연합’(CLASSE)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부안에 대해 완강한 반대 태도를 고수했다. 등록금 인상 대신 정부가 고등교육 지원을 위한 추가 재원을 확보하라고 요구했다. CLASSE는 아예 대학 무상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투쟁이 시작됐다. 지난 2월13일 라발대학의 사회과학대 학생들이 휴업에 돌입했다. 휴업은 이내 퀘벡대학 몽레알 캠퍼스로 확대됐다. 동맹휴업과 함께 거리시위가 시작됐다. 3월22일 동맹휴업에 참가한 학생 30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캐나다에서는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대규모 시위였다.
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신임 마르와 지사가 폐기하겠다고 약속한 주법률 제12호가 이때 등장했다. 이 법률은 대학가의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약하고, 학생 조합들이 집단행동을 위해 수업 참여를 원천 봉쇄하는 피케팅 행위를 금지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타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3월의 시위가 있고 정확히 두 달 뒤인 5월22일에 등록금 인상 철회뿐만 아니라 악법 철폐를 요구하는 집회가 주도(州都) 몽레알에서 열렸다. 이 집회에는 무려 50만여 명이 참가했다. 몽레알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제 투쟁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적극 참여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후 몽레알의 주택가에서는 밤 8시마다 시끄러운 쇳소리가 울렸다. 투쟁을 지지하는 주민들이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나와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는 1970년대 초 칠레의 유명한 냄비 시위를 모방한 것이었다. 당시 칠레에서는 좌파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에 맞서 우파를 지지하는 부유층 여성들이 냄비를 두들기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40여 년 뒤 아메리카의 반대쪽 끝에서는 이것을 정부의 반서민 정책에 맞서는 저항의 표현으로 활용했다. 참으로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런 투쟁 속에서 제1야당 퀘벡당이 등록금 인상 철회를 당론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유당 정부가 정치 위기를 정면 돌파하려는 의도에서 실시한 조기 총선에서 퀘벡당이 원내 제1당이 됨으로써 상황이 반전됐다. 2011년의 전 지구적 반란에 뒤이어 2012년의 반신자유주의 민중운동을 상징하던 퀘벡 대학생 투쟁이 전세계를 향해 모처럼 승리의 팡파르를 울렸다.
그러나 이 승리에는 뭔가 불안한 구석이 있다. 우선 퀘벡당의 의석이 과반수에 한참 못 미친다. 총 125석 중 54석에 불과하다. 득표율도 32% 수준이다. 반면 여당에서 제1야당이 된 자유당은 퀘벡당보다 단지 1% 적은 31%를 득표했고, 50석을 차지했다. 또 다른 우파 정당 퀘벡미래연합(CAQ)은 27%라는 만만치 않은 지지를 얻었지만, 소선거구제 때문에 의석수는 19석에 그쳤다. 어쨌든 두 우파 야당을 합치면 지지율 59%, 의석수 69석에 달한다. 퀘벡당 정부는 불안정한 소수파 내각인 것이다. 소수파 정부이기 때문에 사실 등록금 인상 철회도 입법 형태로는 관철할 수 없다. 마르와 지사의 복안은 주정부 긴급 조치로 등록금을 동결시키겠다는 것이다.
퀘벡연대 등장이 의미하는 것
퀘벡 역사에 길이 남을 대중투쟁을 배경으로 총선이 실시됐음에도 퀘벡당의 성적이 그리 신통치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퀘벡당은 자유당과의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는 등록금 인상 반대를 내걸며 우파 정당들과 대립선을 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퀘벡당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기억이 워낙 강해 이번 선거 한 번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퀘벡은 프랑스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부와 특권은 소수 영국계에 집중돼 있다. 이런 퀘벡에서 1960년대에 ‘조용한 혁명’을 이끈 정당은 자유당이었다. 당시만 해도 자유당은 퀘벡 정치에서 중도좌파의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조용한 혁명’의 결과로 프랑스계 노동자와 서민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자유당 내 좌파의 중추인 프랑스계가 따로 퀘벡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퀘벡당은 사회민주주의적 경제사회 정책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이런 정책을 관철하려면 영국계가 주도하는 캐나다 자본주의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계 주민들이 캐나다 연방에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퀘벡 분리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후 퀘벡당은 퀘벡 독립을 장기 목표로 내세우며 퀘벡주의 좌파 지역 정당으로 발전했다. 캐나다 연방 차원에서는 따로 퀘벡블록(BQ)이라는 정당이 등장해 퀘벡당과 협력하며(연방선거에는 퀘벡블록만 참여하고 주선거에는 퀘벡당만 참여하는 식의 분업 구조) 독립을 추진했다. 이와 함께 자유당은 영국계를 대변하는 우파 정당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는 1980년대 이후 퀘벡당이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 무릎을 꿇고 더 나아가 이를 적극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퀘벡당은 미국과의 자유무역지대협정을 받아들였다. 대학 등록금 인상 시도를 불러온 균형재정 기조도 수용했다. 또한 몇 차례 집권했음에도 퀘벡 독립을 성사시키지 못했고 점차 분리주의 노선을 후퇴시켰다. 주선거에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다는 약속도 어겼다.
이 때문에 2006년 퀘벡연대(QS)라는 새로운 좌파 지역 정당이 등장했다. 퀘벡연대는 퀘벡당이 저버린 퀘벡 독립과 반자본주의의 대의를 다시 선명히 내걸었다. 퀘벡연대는 이번 선거에서 등록금 동결뿐만 아니라 대학 무상교육을 공약했다. 그러면서 대학 등록금 문제의 원상 복귀와 법률 제12호 폐지,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부자 증세를 전제로 퀘벡당과의 선거 협상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했다. 그러나 퀘벡당은 어떤 대화도 거부하고 오히려 퀘벡연대를 집중 견제했다. 이런 견제와 언론의 적대적 태도에도 퀘벡연대는 2008년 총선의 득표율 3.78%를 6.03%로 두 배 가까이 늘리며 (소선거구제인데도) 2명의 당선자를 냈다. 퀘벡당에 대한 노동운동의 점증하는 불만, 그리고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통한 청년층의 급진화가 퀘벡연대의 착실한 성장에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여전한 숙제, 대중투쟁과 제도정당
이런 여러 가지 점에서 퀘벡 학생 투쟁의 승리는 아직 불안한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퀘벡당 정부의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고, 우파 정당들의 공세로 새 정부가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 따라서 투쟁이 중단되기에는 너무 이르고, 운동의 주역들은 대의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좀더 전략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좌파 정치에서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대중투쟁과 제도정당의 관계는 간단치 않은 숙제임이 분명하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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