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ANC, 만델라 한 시대가 저물고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ANC·공산당·COSATU, 삼자동맹이 ‘민족민주혁명’ 배신한 남아공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겹친 남아공과 한국의 비극 이후
등록 2013-01-05 00:02 수정 2020-05-03 04:27

2012년 8월16일 전세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발 외신에 경악했다. 이 나라의 마리카나 광산에서 경찰이 파업 시위대에 발포해 무려 47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학살이었다. 남아공에서는 과거에도 몇 차례 이런 비극이 있었다. 1960년 샤프빌에서 69명이 경찰 발포로 숨진 사건이 있었고, 1976년 소웨토에서 어린 학생 100명이 학살당한 참극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건은 모두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체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그 체제는 무너졌다. 넬슨 만델라와 그 후예가 집권한 지 벌써 18년째다. 그런데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역사가 반복됐다는 사실 앞에서 세계인은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넉 달 뒤인 12월8일, 만델라가 병원에 긴급 후송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구촌의 이목이 다시 남아공으로 향했다. 이미 94살인 이 거인의 최후가 임박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망가웅에서는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2012년은 ANC 창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본래는 잔칫집 분위기여야 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일어난 엄청난 사건들 탓에 그럴 형편이 못 됐다. 당대회는 제이컵 주마 대통령이 대표에 재선되고 그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당대회가 폐막할 무렵 만델라는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병문안을 간 주마 대통령은 그가 건강을 되찾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누구나 이게 단지 잠깐의 휴지기일 뿐임을 안다. 분명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공산당이 주도한 ANC의 집권
ANC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남아공 반인종주의 투쟁을 주도한 유서 깊은 정치조직이다. ‘내셔널 콩그레스’(National Congress)라는 이름은, 비록 남아공의 경우에는 ‘민족회의’라 번역되기는 하지만, 인도 ‘국민회의’와 같다. 영국 식민 통치에 저항한 간디, 네루의 국민회의와 같은 시대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ANC는 이런 반제국주의 정신을 협애한 흑인 민족주의에 가둬두지 않았다. 물론 ANC의 다수는 흑인(그중에서도 반투족)이지만,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흑인·유색인(대개 인도계)·백인이 공존하는 다인종 국가다. 그리고 이런 무지개 국가의 기반으로서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지금도 ANC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국제조직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회원이다.
이런 ANC의 역정에서 남아공 공산당(SACP)은 좋은 동반자였다. 치열한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공산당은 ANC의 유일한 우군이었다. 그러면서 ANC는 점차 공산당의 이론적 영향을 받았다. 당면 과제를 ‘민족민주혁명’이라 규정한 공산당 이론이 곧 ANC의 방침이 되었다. ANC는 1960년대에 비폭력 저항 노선에서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하며 공산당을 통해 동구권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기도 했다. 현재도 ANC와 공산당은 동맹 관계다. 마치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 시기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이중 당적을 갖고 활동했던 것처럼, 남아공 공산당 역시 자신의 조직을 유지한 채 ANC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ANC-공산당 합작 체제에 노총인 ‘남아공 노동조합회의’(COSATU)까지 더해 흔히 ‘삼자동맹’이라 부른다. 남아공에서 ‘진보’ 세력이라고 하면 곧 이 삼자동맹을 뜻한다. 1994년 만델라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권력을 쥔 것은 단지 ANC만이 아니라 이 삼자동맹이었다. 삼자동맹은 신자유주의 전성기였던 당시에 민족민주혁명을 수행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들은 그 경제·사회 프로그램으로서 국가자본주의적 ‘재건개발계획’(RDP)을 야심차게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RDP는 이내 폐기됐다. 대신 신자유주의적 ‘성장, 고용 및 재분배’(GEAR) 전략이 채택됐다. 금광 등 천연자원에 대한 외국 기업 소유는 그대로 유지됐고, 오히려 더 많은 해외 자본 유치에서 성장 동력을 찾았다. 국내 대기업은 해외 금융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했다. 단체교섭을 제도화하라는 COSATU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재계는 마음껏 노동력 사용을 ‘유연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음베키 대신 주마가 집권했지만
그 결과는 극심한 양극화였다. 정권에 참여한 흑인 엘리트들은 대기업 지분을 제공받으며 ‘흑인 자본가’로 성장했다. 덕분에 인종 범주에 따른 경제적 격차는 줄어들었다. 반면 전반적인 빈부 격차는 오히려 늘어났다. 실업률이 40%에 달하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다. ‘민주’ 정권 18년 동안 대중의 살림살이는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이런 상황은 만델라의 후계자인 타보 음베키 대통령 시기(1999~2008년)에 절정에 달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 단, 이것은 거리의 봉기가 아니라 궁정 쿠데타로 나타났다. ANC 산하 청년동맹, 공산당, COSATU 등 삼자동맹 내 좌파가 똘똘 뭉쳐 음베키 축출에 나섰다.
민주화 이후 남아공 정치체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는다. 그리고 국회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구성한다. 이제까지 총선에서 ANC는 매번 흑인 대중의 몰표로 60% 이상의 막강한 득표율을 보였다. 이는 곧 ANC가 지명한 후보가 자동으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현직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ANC 내에서 불신임을 당하면, 마치 내각책임제의 총리처럼, 교체될 수 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2007년 ANC 전당대회에서 주마 현 대통령이 좌파들의 지지로 음베키를 물리치고 대표가 되자 음베키는 1년 뒤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1년간 과도기를 거쳐 실시된 2009년 총선에서 주마는 예정대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ANC는 분당 사태까지 겪었다. 음베키 추종 세력이 탈당해 ‘민중회의’(COPE)라는 신당을 따로 차린 것이다(총선에서 약 7% 득표).
사실 주마도 ANC의 다른 간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인물이다. 그 역시 민주화 이후 흑인 자본가 대열에 합류한 군상에 속한다. 몇 차례 부패 사건에 연루됐으며, 심지어 성추행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하지만 음베키와 대립하며 ‘좌파’적 언사를 구사한 게 좌파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마가 집권하자 실제 공산당과 COSATU 인사들이 중용됐고, RDP의 무산된 꿈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일었다.
그러나 현실은 실망스러웠다. ANC 내 다수파가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바뀌었을 뿐 체제는 바뀌지 않았다. 기존 경제 기조는 의연히 유지되었다. 이런 가운데 2012년 들어 COSATU의 단체교섭 결과에 반기를 든 자발적 파업이 폭발했다. 마리카나 사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전국의 광산과 농장지대, 그리고 일부 공단에서 1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 물결에 동참했다. ‘불법 파업을 중단하라’는 COSATU 간부들의 호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ANC 정권, 게다가 좌파의 반란으로 등장했다는 주마 정권은 이런 대중의 궐기에 총탄으로 답했다. 이와 함께 ‘민족민주혁명’은 숨을 거두었다.
공산당, COSATU도 아니라면
남아공 민중은 이제 ‘민족민주혁명’의 배반당한 약속을 대체할 또 다른 ‘혁명’의 요청에 갑작스레 마주하게 되었다. 음베키를 주마로 바꾸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게 드러났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적 대안이다. ANC ‘이후’의 정치적 구심으로 과연 누가 있을까?
우선 공산당을 보자. 공산당은 그간 삼자동맹 안에서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일관되게 비판해온 세력이다. 그렇다면 공산당이 ANC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까? 마리카나 사태에 대한 이 당의 반응을 보면 이런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공산당은 광부들의 불신 대상이 된 COSATU 산하 전국광원노조(NUM)를 편들며 비공식 파업의 지도자들을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주마 정부를 지키려고 기꺼이 대중의 목소리를 외면하길 선택한 것이다.
그럼 COSATU는 어떤가? 현 COSATU 사무총장 즈웰린지마 바비는 이 조직의 양심이라 할 만하다. 그 역시 좌파 진영에 속하기는 하지만 주마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길 꺼리지 않았다. 한때 삼자동맹의 내부 혁신을 기대하는 이들이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바비 총장은 이번에 광산 지대를 순회하며 ‘파업 자제’를 호소하는 바람에 불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파업 노동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은 인물이 하나 있기는 하다. 최근 ANC에서 축출된 전 ANC 청년동맹 지도자 줄리어스 말레마다. 마리카나 학살 이후 말레마는 파업 지지 입장에서 이곳을 방문한 유일한 유명 정치인이었다. 그를 환영하러 1만 명이 넘는 광산 노동자 가족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광산 국유화’를 요구했다. 영국에 본거지를 둔 론민 같은 사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광산을 소유해야 국부 유출도 막고 비정규직 저임금 고용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면 말레마야말로 지금 남아공에 필요한 급진 개혁을 대변하는 정치인 같은데, 실상은 좀더 복잡하다. 이제 갓 31살인 말레마는 주마와 같은 선동 정치가다. 흑인 대중의 인기를 끌기 위해 백인들에 대해 역인종주의 언사를 남발하고, 이웃 나라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독재 정권을 옹호한다. ANC에서 쫓겨난 것도 이런 인종 증오 선동 때문이었다.
폐허 위에서 대안 찾아야 하는 두 나라
남은 대안은 트로츠키주의자·아나키스트들이 만든 ‘민주좌파전선’(DLF)이라는 소규모 조직 정도다. 그러나 이 신생 조직이 아직도 지지율 40%는 거뜬히 넘는 여당에 맞서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음베키의 동생이면서도 그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모엘레치 음베키는 남아공에 결국은 튀니지식 혁명이 일어날 거라 예언하면서도 그 시점을 2020년으로 잡는다. 무려 8년 뒤지만, 과연 그때가 되면 대안적 정치 구심이 성장해 있을까?
남아공이나 한국이나 모두 민주화 과정과 신자유주의 시기가 중첩되는 비극을 겪은 나라다. 자본 독재와 겹쳐진 민주주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불신의 대상이 됐다. 지금 두 나라 민중 모두 이런 폐허 위에서 새로 시작하는 법을 깨쳐야 한다는 공통의 과제 앞에 서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