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6~30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 서 세계사회포럼(WSF)이 열렸다. 세계사회 포럼은 ‘다보스포럼’이라고도 불리는 세계경 제포럼(WEF)에 맞서 브라질에서 시작된 전 세계 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 대회다. 그런 데 그 세계사회포럼이 올해에는 2011년 ‘아 랍의 봄’ 진원지 튀니지에서 개최된 것이다.
<font size="3">정국 주도하는 튀니지노동총연맹</font>
튀니지에서 벤 알리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으로 시작된 아랍 민주화 물결은 최근 이 집트 정국 혼란, 시리아 내전 등으로 잠시 주 춤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튀니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과 두 달 전인 2월6일에 좌파 지도자 초크리 벨라이드가 암살당하는 사건 이 일어났다.
암살 배후로는 제헌의회 내 제1당으로서 혁명 이후 연립정부를 이끌어온 이슬람 정 당 ‘엔나흐다 운동’(‘부흥 운동’이라는 뜻. 이 하 부흥당)이 지목됐다. 부흥당과 직접 관련 은 없더라도 최소한 이들과 관계를 맺은 이 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게 정설이 다. 좌파·노동 진영은 혁명 이후 가장 큰 규 모의 파업과 시위로 이런 테러에 항의했다. 부흥당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내각 이 새로 구성될 정도로 정치 위기는 심각했 다. 세계사회포럼은 이런 혼란 속에 진행되 었다.
그런데도 이번 대회는 대성공이었다는 평 가를 받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제로 삼아 활발 한 토론을 벌였다. 또한 재정위기로 고통받 는 지중해 건너편 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참가해 ‘아랍의 봄’과 긴축 반대 운동의 연대 를 모색했다. 총 2만 명이 행사에 참가해 성 황을 이루었다. 이런 것을 보면, 튀니지는 분 명 여타 아랍 국가들과 다른 데가 있다. 사회 에 깊이 뿌리내린 좌파와 대중운동의 힘이 감지된다.
그 힘은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에서 나온 다. 튀니지 민주혁명은 2010년 12월 모하메 드 부아지지라는 청년이 노점상 탄압에 항 의하며 분신하면서 시작됐다. 이 사실이 소 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자 수많은 젊은이가 거리로 쏟아져나와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냈다. 그래서 이 혁명 은 대개 청년들의 혁명으로 기억된다. 하지 만 또 다른 중요한 행위자가 있었다. 튀니지 노동총연맹(UGTT)이다. 노총이 정권으로 부터 등을 돌린 게 벤 알리의 사퇴에 큰 영 향을 끼쳤다. 벨라이드가 암살당한 직후에 도 노총은 항의 총파업을 조직하며 정국을 주도했다.
<font size="3">혁명에 앞장선 비합법 조직들</font>
조합원 50만 명의 튀니지노총은 프랑스에 맞선 독립운동 시기부터 정치투쟁을 활발 히 벌였다. 독립투쟁 과정에서는 노총의 초 대 사무총장 파르핫 하체드가 희생당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노총은 튀니지에서 세속 좌 파의 버팀목이자 대중적 기반으로 자리잡았 다.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는 이런 노 총을 일종의 공동 집권 주체로 대접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부르기바의 뒤를 이은 벤 알리 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르 기바 대통령이 장기 집권에도 어쨌든 좌파 민족주의 기조를 유지한 데 반해, 벤 알리 정부는 독재를 자행한데다 정책 기조까지 신자유주의로 선회했다.
이런 알리 정부에 참여하는 바람에 노총 내부에 위기가 닥친 적도 있다. 하지만 혁명 직전에 지도부가 반정부파로 바뀌면서 노총 은 혁명 과정에서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노총은 줄곧 혁명 세력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우편·통신·보건·교육 부문 에서 투쟁이 치열하다. 이 때문에 이슬람 근 본주의자들의 공격 대상 1순위가 되기도 하 지만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제헌의회 의석에도 일정하게 반영돼 있다. 이슬람 세력인 부흥당이 제1당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의 의석은 총 217석 중 89석에 불과하다. 나머지 의석은 세속파 정당들이 나눠 갖고 있다. 이 중에는 좌파 색이 뚜렷한 정당도 있다.
가령 네 번째로 많은 득표(7.03%)를 해 20석을 확보한 ‘노동과 자유를 위한 민주포럼’(흔히 ‘에타카톨’이라는 아랍어 약칭으로 불린다)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5석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현대주의의 기둥’은 ‘에타지드 운동’이라는 정당이 이끌고 있는데, 이들은 이전 튀니지 공산당을 이어받은 당이다. 이 중 에타카톨은 세속파 자유주의 정당인 ‘공화국회의’와 함께 부흥당의 연립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타카톨이나 에타지드를 혁명의 대변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벤 알리 정부 시절에 정권과 정면 대결을 피하며 합법 정당의 지위를 유지한 전력이 있다. 2011년 1월 혁명에 앞장선 정치세력들은 대개 독재정권 시절에 비합법 조직이었다. 벤 알리가 물러난 뒤에야 이들은 공개적인 대중정치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혁명 직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상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혁명의 주역인 청년·노동자들에게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한 정치적 동지다. 암살당한 벨라이드도 바로 이들의 일원이었다.
이들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튀니지 좌파는 이념적 위기 상태였다. 그동안 좌파를 대변하던 튀니지 공산당이 프랑스 공산당의 영향 때문에 독립 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탓이었다. 그래서 독립 이후 공산당은 그 위상이 크게 실추됐다. 이 빈 공간을 메우며 새로운 세대의 좌파가 등장했다. 대학가의 학생운동에서 출발한 ‘아파크’(‘전망’이라는 뜻) 그룹이다. 이들은 부르기바 정권에 협력하던 구세대 좌파와 달리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아파크 그룹은 1980년대에 튀니지노동자공산당(PCOT)이라는 정당으로 발전했다. 노동자공산당은 벤 알리 정권에 맞선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래서 늘 탄압에 시달려야 했고, 사무총장인 함마 함마미는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 장기수 신세였다. 독재정권이 무너지자마자 노동자공산당은 당대회를 열어 당명에서 ‘공산주의’를 떼고 튀니지노동자당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당의 이념은 여전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다.
<font size="3">좌파들 모두 노총 내에 기반 두고 활동</font>
그런데 이들이 신좌파를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이 있다. 1960년대 말 아파크 그룹 안에는 마오주의 열풍이 불었는데, 그 영향으로 1967년 마오주의 분파가 떨어져나오게 된다. 이들은 ‘애국민주파’로 자칭하며 (‘불꽃’이라는 뜻)라는 정치 신문을 내기 시작했다. 애국민주파는 사회주의혁명을 당면 과제로 내세우는 아파크 그룹의 노선에 반대했다. 대신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선 투쟁과 농지개혁 과제에 집중하자는 입장이었다.
어찌 보면 아파크 그룹과 애국민주파 사이의 논쟁 구도는 1980년대 한국 운동권의 민족해방파(NL)-민중민주파(PD) 대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주창한 아파크 그룹이 ‘튀니지판 PD’라고 한다면, 반제국주의 민주혁명을 강조한 애국민주파는 NL에 가깝다고 할까. 물론 ‘주체사상 없는’ NL이겠지만 말이다.
애국민주파도 1980년대에 몇 개의 정당으로 발전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벨라이드가 이끌던 민주애국자운동(MOUPAD)이다. 비록 구체적인 전략은 다르지만, 민주애국자운동도 노동자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운다. 1월 혁명 와중에 이 두 당은 ‘1월14일 전선’을 만들어 협력했다. 하지만 이후 선거에는 독자적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2011년 10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노동자공산당은 1.57%로 3석을 확보했고, 민주애국자운동은 0.83%로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거리에서는 가장 주목받던 세력들이 원내 소수파에 머물고 만 것이다.
이후 2012년 내내 좌파 통합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선거 대응도 문제였지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대중투쟁을 효과적으로 대변하기 위해서도 공동 대응이 시급히 필요했다. 노동자공산당의 함마미와 민주애국자운동의 벨라이드가 이 노력의 중심에 섰다. 벨라이드는 우선 몇 개 조직으로 나뉘어 있던 애국민주파부터 하나로 묶어 통합민주애국자당을 새로 결성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좌파 세력들과 함께 ‘1월14일 전선’의 확대 재건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노동자공산당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정파인 노동자좌파연맹(LGO)도 함께했다.
쉽지는 않았다. 좌파들이 항상 그렇듯이 날선 논쟁도 뒤따랐다. 일부에서는 노총이 연합전선의 구심이 되어야 한다며 노총이 조직적 지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좌파 정파들을 결집하고 나서 노총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자는 현실론이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2012년 8월 ‘혁명 대의 실현을 위한 인민전선’(이하 인민전선)이 발족했다. 인민전선은 9월에 전국대회를 열어 강령을 채택하고 노동자당의 함마미를 대표로 선출했다. 연합전선이지만 하나의 정당에 버금가는 구심력을 다진 것이다.
인민전선에는 노동자당, 통합민주애국자당, 노동자좌파연맹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9개의 정당 혹은 정치조직이 결합했다. 이 중 ‘1월14일 전선’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아랍 민족주의 세력들도 있다. 나세르주의 조직과 두 개의 바트주의 조직이 그들이다. 녹색당과 사회민주주의 성향 조직도 함께했다. 좌파 민족주의부터 트로츠키주의까지 범좌파를 총결집했다고 하겠다. 이 다양한 세력들의 공통점은 모두 노총 내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정파라는 것이다.
<font size="3">다음 선거에서 15% 득표 가능성</font>
벨라이드는 이런 노력의 와중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만큼 이슬람 우파를 비롯한 적대자들에게 인민전선이 만만치 않은 호적수로 보인 탓이었다. 다음 선거에서는 인민전선이 15%까지 득표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도 있다. 혁명 이후 2년이 지났는데도 헌법안조차 내놓지 못하는 지금 같은 지리멸렬 상태가 계속될수록 인민전선의 성장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튀니지 혁명이 ‘아랍의 봄’의 신호탄이 된 것처럼, 튀니지 좌파의 성장은 다시 한번 아랍 세계 전체를 깨우는 기상나팔이 될 것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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