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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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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좌파들의 비극 유럽 좌파의 딜레마

총선서 져도 급진화 반대해 좌파당과 연대 않는 독일 사회민주당
메르켈 정권 연장된다면 유로존의 균열과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
등록 2013-09-28 14:33 수정 2020-05-03 04:27

“유럽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한 달 전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여성 사무총장 안드레아 날레스는 영국 일간지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지면에 이 연재를 시작한 지난해 초에 세상은 한창 유럽의 재정위기로 시끄러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날레스의 진단처럼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구제금융 조건으로 강요된 긴축정책 때문에 재정위기 국가들의 경제 사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국가들의 장기 침체는 결국 독일 같은 수출 국가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적-녹 연정’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이런 상황에서 독일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의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9월22일 독일에서는 연방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이번 선거는 비단 독일 한 나라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온 유럽의 눈길이 독일을 향해 쏠려 있다. 유럽연합(EU)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게 독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독교민주연합(CDU)-자유민주당(FDP) 연립정부는 남유럽 국가들에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러면서 독일 경제는 수출 확대와 자본 유입으로 홀로 이득을 챙겼다. 이 기조가 계속되는 한, 유로존이 현재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총선에서 메르켈 진영에 맞서는 제1야당은 사회민주당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창당한 지 150년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좌파 정당이다. 한데 이 당은 지금 긴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 1998∼2005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끌던 사회민주당-녹색당 연립정부(‘적-녹 연정’)가 위기의 발단이었다. 1999년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활동하던 당 대표 오스카어 라퐁텐이 돌연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선 대립이었다. 녹색당 쪽 입각자들까지 포함한 다수의 장관들은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 노선에 가까운 정책 기조를 따랐다. 반면 라퐁텐은 정통 사회민주주의를 복구하자는 입장이었다. 이 대립에서 독일판 ‘제3의 길’론자들이 승리한 것이다. 몇 년 뒤 라퐁텐은 아예 사회민주당을 탈당하기에 이른다. 전임 당 대표가 탈당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편 정부 안에서 거칠 게 없어진 슈뢰더 총리는 ‘어젠다 2010’이라는 이름 아래 복지제도 및 노동시장의 ‘개혁’에 나섰다. 이 정책을 입안한 위원회를 폴크스바겐 경영자 출신인 페터 하르츠가 이끌었기 때문에 흔히 ‘하르츠 개혁’이라고도 부른다. 그 핵심은 복지 축소와 노동 유연화였다. 실업급여 수급자의 구직 의무를 강화했고, 파견근로·정리해고 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그동안 영미식 신자유주의로부터 많이 비껴나 있던 독일 사회에 신자유주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그것도 우파 정부가 아닌 적-녹 연정이 말이다.
이때부터 사회민주당에서는 대규모 탈당 사태가 벌어졌다. 라퐁텐의 탈당은 그 신호탄이었다. 주로 하르츠 개혁에 분노한 노동조합원들이 집단 탈당했다. 1998년 집권 때 사회민주당 당원 수는 78만여 명이었는데, 2000년대 중반에 50만 명대로 줄어들었다. 2005년 총선은 탈당 러시 속에 치러졌고, 따라서 ‘메르켈 바람’이 아니었더라도 권좌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사회민주당보다 오히려 기독교민주연합이 당원 수가 더 많은 형편이다.

사민당의 위기에서 성장한 좌파당

그런데도 슈뢰더 정부의 정책 기조를 따르는 인물들이 이후에도 계속 사회민주당의 얼굴 역할을 했다. 2005∼2009년 사회민주당이 메르켈 총리 아래서 대연정에 참여했을 때 주요 장관직을 맡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나 페어 슈타인브뤼크가 그런 사람들이다. 슈타인브뤼크는 이번 총선의 사회민주당 총리 후보이기도 하다. 이들 아래서 지지율은 20% 초반(2009년 총선 득표율은 23%)으로까지 떨어졌다. 사회민주당 역사상 기록적으로 낮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민주당의 하향세와 대비되는 게 신흥 좌파 정당인 좌파당(Die Linke)의 등장과 성장이다. 좌파당의 뿌리는 둘이다. 하나는 옛 동독 사회주의자들의 결집체인 민주사회주의당(PDS)이다. 민주사회주의당은 옛 동독 지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강력한 세를 자랑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옛 동독 바깥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그레고르 기지 같은 인기 있는 대중 정치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돌파구는 사회민주당의 위기로부터 열렸다. 옛 서독 지역의 사회민주당 탈당 세력은 2005년 총선을 앞두고 준정당 조직인 ‘노동과 사회정의’(WASG)를 출범시켰다. 라퐁텐과 상당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그간 소수 정파 활동을 벌이던 다양한 급진 사회주의자들도 결합했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 탈당 세력이 이 당 바깥에 유의미한 새 좌파 흐름을 만든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반전파가 탈당해 독립사회민주당을 만들고 독일 혁명 와중에 공산당이 등장한 이후 거의 한 세기 만에 처음이었다. 이 ‘노동과 사회정의’가 바로 좌파당의 또 다른 뿌리다. 전국 선거에서 협력하던 민주사회주의당과 ‘노동과 사회정의’가 2007년 통합해 새로 만든 정당이 좌파당이다.
창당 이후 좌파당은 쭉 성장 가도를 걸어왔다. 물론 급진 좌파 특유의 이념 논쟁이 가열돼 당의 존립 자체가 의문시된 적도 있었다. 주류 언론은 노골적으로, 라퐁텐으로 대표되는 옛 서독 쪽 당원들의 급진주의와 기지로 대표되는 옛 동독 쪽 당원들의 현실주의 사이의 대립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잡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당은 상승세를 유지했다. 2005년 총선에서 얻은 8.7%에 이어 2009년 총선에서는 11.9%까지 획득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여론조사에서 9% 정도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특히 옛 서독의 노동계급 밀집 지역인 자를란트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는 게 중요하다.

야당 집권 가능성 그리 높지 않아

사회민주당으로서는 좌파당의 성장에 나름대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주로 당내 좌파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정치는 당내 우파가 주도한 반면, 당 골간 조직에서는 좌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앞에 소개한 날레스 사무총장도 당내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번 총선 공약에도 당내 좌파의 주장이 많이 반영됐다. 그 핵심 내용은 시간당 8.5유로의 법정 최저임금 도입, 교육·훈련 예산 증액, 보육시설 확충, 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규모 인프라스트럭처 투자, 그리고 EU 차원의 공공 투자 및 금융 규제다. 이 중에서 특히 강조하는 게 법정 최저임금 도입이다. 독일에는 아직도 최저임금제도가 없다. 이제까지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아서 산업별 단체협상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 하지만 이제는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약화돼 단체협상만으로는 저임금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뒤늦게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한데 이런 사회민주당의 공약은 좌파당 공약과 많은 부분이 겹친다. 좌파당도 법정 최저임금 도입과 보육시설 확충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물론 차이도 있다. 좌파당은 하르츠 개혁으로 축소된 복지의 원상회복을 강조한다. 사회민주당·녹색당과 차이가 좀더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대외정책이다. 두 당은 독일군의 해외 파병에 찬성하지만, 좌파당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럼에도 사회민주당 공약과 좌파당 공약은 분명 서로 만나는 부분이 있다. 좌파당의 슬로건 ‘100% 사회국가’와 사회민주당의 슬로건 ‘좋은 사회’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유럽 국가에서 흔히 그러는 것처럼 일정한 선거 연합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현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지지율에 좌파당의 지지율까지 더해야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을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은 좌파당과는 결코 연대하지 않겠다고 못박고 있다. 심지어 좌파당이 연정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연정 구성에는 찬성표를 던져주는 것까지 사양한다고 밝힐 정도다.
여기에 독일 좌파 정치의 비극이 있다.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좌파는 좌파당과의 연대, 더 나아가 연립정부 구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에 대한 날선 반대가 더 많다. 전임 당 대표 쿠르트 베크는 좌파당과의 연대를 지지한 것 때문에 결국 대표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런 입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좌파당의 한 뿌리가 민주사회주의당이라서 경원시하는 반공 분단 정서도 있고, 라퐁텐 등 사회민주당 탈당파에 대한 감정의 앙금도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이 급진화할 가능성에 대한 당내 주류의 경계다. 사회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시기의 체질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아무튼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이번 독일 총선에서 야당이 집권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좌파가 거쳐야 할 재구성의 과정

독일 좌파의 비극은 결국 유럽 좌파 전체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메르켈 정권이 연장된다면, 유로존의 균열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물론 아직 변수는 있다. 최근 지지율이 5%선을 오락가락하는 자유민주당이 의회 진출 하한선인 5% 이하의 득표에 그친다면 메르켈과 기독교민주연합의 재집권에 빨간불이 켜질 것이다. 단, 이 경우에도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보다는 2005∼2009년 같은 대연정이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되면 좌파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당이 ‘사실상의 유일 좌파 야당’으로서 메르켈 체제에 맞서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게 독일 좌파의 철저한 재구성을 위해 더 나은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은 분명 더 힘들어지고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겪고 나서 좌파가 거쳐야 할 재구성 과정은 이렇게 고되고 기나긴 것이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이러한 시련 혹은 단련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지금 독일은 그 가장 첨예한 무대다.

장석준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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