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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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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덧입힌 스웨덴! 상상을 실현할 스웨덴?

노동운동가 출신 뢰프벤 새 대표 선출로 활력 찾은 스웨덴 사회민주당
국제적인 자본-노동 간 협약 대안 제시하며 ‘복지국가의 지구화’ 꿈꿔
등록 2013-08-14 16:21 수정 2020-05-03 04:27

미국 제도주의 경제학의 거장 로버트 하일 브로너(국내에도 등의 명 저로 잘 알려진)는 생전에 “약간은 상상을 덧입힌 스웨덴”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고 한 다. 현실의 스웨덴이 이상향은 아니다. 하지 만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들 중 그나마 가 장 나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평등한 세 상을 만드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미국인 들을 설득하자면 “약간은 상상을 덧입힌 스 웨덴”이 필요하다는 게 하일브로너의 지론이 었다.
‘상상 속 스웨덴’과 현실의 스웨덴
이게 미국에서만 통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스웨덴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신 자유주의의 극성기를 거치면서 “다른 사회 가 가능하다”는 사실의 거의 유일한 증거 취 급을 받았다. 한때 ‘아주 많은 상상을 덧입힌 소련’이 했던 역할까지 모두 이제는 “약간은 상상을 덧입힌 스웨덴”의 몫이 되어 있다.
그런 스웨덴에서 지난 5월, 폭동이 일어났 다. 이주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스톡홀름 외 곽에서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주민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며칠간 유혈 사태가 계속됐 고, 복지국가의 모범이라던 스웨덴의 명성에 는 커다란 금이 갔다. 전체 인구의 15%에 이 르는 이주민들이 그간 차별과 실업, 빈곤에 시달려왔음이 세상에 드러났다. “상상 속 스 웨덴”과 현실의 스웨덴 사이의 간극이 아프 게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스웨덴 현지에서는 이 사건의 충격이 프 레드리크 레인펠트 총리의 우파 연정에 대 한 불만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파 연정은 레 인펠트 총리가 속한 온건당에 더해 중도당· 자유인민당·기독교민주당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2006년, 2010년 총선에 연거푸 승리 해 7년 넘게 집권 중이고 이제는 다음 총선 을 1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연정 참여 정당 들의 지지율 총합이 사회민주당·좌파당·녹 색당의 지지율 합계에 5%포인트 이상 밀리 는 형국이다. 2012년 초에 사회민주당이 스 테판 뢰프벤을 새 대표로 선출한 이후 줄곧 이런 양상이다. 이 와중에 스톡홀름 폭동까 지 겹친 것이다. 현 정부의 복지 축소 기조가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우파 연정은 더욱 흔 들리게 되었다. 이제 여론은 완전히 좌파 야 당 진영으로 넘어간 듯 보인다.
스웨덴 좌파의 좌장은 물론 복지국가 건 설의 주역인 사회민주노동당(약칭 사회민주 당)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은 사회민주당 에게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였다. 2010년 총 선에서 사회민주당은 정권 탈환을 위해 여 성 대표 모나 살린을 앞세워 야심차게 선거 에 임했다. 처음으로 선거 전에 좌파당·녹 색당과 연립정부 구성 협정을 맺고 선거연합 (‘적색-녹색 연합’)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 런데도 결과는 패배였다.
선거 평가를 둘러싸고 당내 좌파가 목소리 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이 신자유주의에 흔 들려 자신의 가치와 원칙으로부터 이탈한 게 패인으로 지목됐다. 이 분위기를 등에 업고 새 대표로 선출된 인물이 부대표이던 호칸 유홀트다. 그는 “시장경제는 지지하지만 자본 주의는 반대한다”는 당 강령의 내용을 새삼 강조하면서 복지 확대를 약속했다. 모처럼 사회민주당이 활력을 되찾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 언론에 유홀트 대표의 배우 자가 주거 수당을 과다 청구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나중에 부당 지급분을 자진 반납 했고, 한국 정치권의 기준으로 보면 비리라 고 하기도 뭣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 로 당이 다시 침체 상태에 빠지자 유홀트 대 표는 결국 자진 사퇴했다. 자칫하면 당의 위 기가 장기화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생산 영역의 민주화를 추구하자
그러나 새 대표 뢰프벤의 등장이 전화위복이 돼주었다. 뢰프벤은 당 대표가 되기 전까지 12년간 금속노조 위원장을 맡았던 고참 노동운동가다. 사회민주당의 정식 당명이 사회민주‘노동’당이고 그만큼 노동자 정당임을 강조하지만, 놀랍게도 124년 역사 동안 이 당에는 노동운동 출신 대표가 한 명도 없었다. 뢰프벤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뢰프벤이 유홀트처럼 당내 좌파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금속노조 시절부터 실용주의자로 유명했다. 심지어 대재벌인 발렌베리 가문과도 막역한 사이다. 당 대표가 되고 나서도 이민 규제에 찬성하는 등 현실에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럼에도 최초의 노동조합 출신 당 대표라는 사실이 던져주는 효과는 작지 않았다. 덕분에 당 지지율은 다시 30% 이상 수준으로 높아졌다.
뢰프벤은 국내 정책의 실용주의를 국제 정책의 새로운 비전으로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노동조합 지도자의 경력을 살려, 전 지구적인 자본-노동 간 협약을 맺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전세계 노동자의 임금 및 노동조건 기준을 정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지향을 지구화할 수 있으며 이민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1960년대를 전후해 스웨덴의 국내 복지 체계가 완비되자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다음 단계의 원대한 목표로 두 가지 비전이 등장했다. 하나는 소비 영역의 민주화라 할 수 있는 복지국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산 영역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즉, 노동자가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 방향의 주창자는 당의 대표적 이론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였고, 이게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 1970년대에 루돌프 메이드네르가 금속노조의 위촉을 받아 제출한 임금노동자기금 구상이었다.
다른 한 방향은 일국 차원의 복지국가를 이제는 전세계로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이 입장의 대표자는 당의 또 다른 주요 이론가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74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공동 수상)인 군나르 뮈르달이었다. 뮈르달은 1960년에 낸 라는 인상적 제목의 저서에서 이런 비전을 과감히 제시했다. 그의 저발전 지역 연구는 이후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의 등장에 큰 자극이 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실제 역사에서는 뮈르달이 염원한 복지국가의 지구화가 아니라 금융화된 자본의 지구화가 관철되었다. 하지만 이제 신자유주의의 황혼이 완연해지자 뢰프벤은 이 불발된 전망을 되살리려 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구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게 실현되려면, 사회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 과거 사회민주당 단독으로 과반수 득표를 기록한 적도 있지만(1940년대),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 지난 총선에서 함께 ‘적색-녹색 연합’을 구성했던 두 정당, 좌파당과 녹색당이 있어야 한다.
적록 연합 최대 수혜자 녹색당
이 중 좌파당은 과거 공산당의 후신이다. 스웨덴 공산당이 1990년에 ‘좌파당’으로 당명을 바꾼 것이다. 좌파당은 당의 이념으로 사회주의와 함께 여성주의를 강조한다. 또한 핵발전 반대 입장을 견지하면서 녹색 정당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사회민주당과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사회민주당이 유럽연합(EU)에 우호적인 데 반해 좌파당은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사회민주당이 우왕좌왕할 때 좌파당은 총선에 ‘복지당’으로 잠시 이름을 바꿔 출마할 정도로 복지국가를 완강히 사수하려 한다. 득표율은 한때 사회민주당 실망층이 몰려 12%까지 치솟았던 적도 있지만(1998년 총선), 대체로 5% 선을 맴돈다.
득표율 측면에서 좌파당보다 비중이 더 큰 것은 녹색당이다. 스웨덴 녹색당의 정식 명칭은 ‘환경당-녹색’이다. 이 당은 서독 녹색당이 출범하고 1년 뒤인 1981년에 등장했다. 독일의 우당(友黨)과 마찬가지로 이 당도 신좌파가 창당의 구심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자처한다. 하지만 지난 총선의 선거연합에서도 알 수 있듯 우파보다는 좌파 쪽과 친화성이 더 강하다.
사실 ‘적색-녹색 연합’의 최대 수혜자는 녹색당이었다. 그간 녹색당의 총선 득표율은 좌파당과 마찬가지로 5% 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0년 총선에서 7.34%로 상승했다. 이 상승세가 계속 이어져 지금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10% 이상의 지지율을 보인다. 여기에는 녹색당이 스웨덴 정가에 몰고 온 새로운 정치 문화도 큰 몫을 했다. 남녀 1인씩인 공동대표 중 한 명인 젊은 정치인 구스타브 프리돌린은 그 한 사례다. 그는 1983년생이니 이제 겨우 30살이다. 하지만 이미 2선 의원이다. 그는 2002년에 19살의 나이로 의회에 진출해 전세계 최연소 의원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녹색당 당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1살 때였다. 한국의 정치문화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아무튼 지금의 기세가 쭉 이어진다면 내년에 스웨덴에는 좌파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회민주당·좌파당·녹색당이 지난번 총선처럼 선거연합을 맺는 데 성공한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물론 난관은 적지 않다. 2010년에도 사회민주당 안에서는 좌파당과의 합작 여부를 놓고 좌·우파 사이에 격론이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논란이 있을 것이다. 지지율이 높아진 녹색당이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에 대해 예전보다 소극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 이미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녹색당이 우파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한 사례도 있다. 게다가 좌파 야당들만 우파 연정의 실패로부터 득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극우 민주당(인종주의 정당인데 이름이 ‘민주당’이다!)도 지지율 10% 선을 내다보며 약진하고 있다.
세계인의 공유 자산인 ‘스웨덴’
하지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스웨덴 좌파에 더 많은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은 분명하다. 총선을 한 달 앞둔 독일 상황과 견줘봐도 그렇다. 분단의 기억 때문에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좌파당은 협력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좌파당을 배제한 사회민주당-녹색당 연합이 좌파당의 지지율만큼 우파 기독교민주당-자유민주당 연합에 밀리는 형편이다. 반면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당-좌파당-녹색당 연대가 충분히 가능하며, 이미 한 차례 경험도 있다. 그래서 내년 총선 결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약간은 상상을 덧입힌 스웨덴”이 이미 세계인의 공유 자산인 한, 이것은 결코 스웨덴 민중만의 기대는 아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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