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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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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이 견인한 인도 좌파의 재구성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1991년 이후 신자유주의 치닫던 인도, 양극화 반발한 총파업 물결
좌파정당, ‘집권당 2중대’ 이미지 벗고 대안세력 성장할까
등록 2012-11-09 21:33 수정 2020-05-03 04:27

9월20일 인도의 대도시들에선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뭄바이에서는 은행들이 하루 종일 손님을 받지 않았다. 콜카타에서는 상점들이 모두 문을 굳게 닫아걸었고, 거리에는 차들도 한산했다. 델리에서는 대중교통이 마비돼 시민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날 5천만 명의 인도 노동자들이 12시간 파업에 돌입했고, 상당수 자영업자들도 철시(撤市)로 이에 동참했다.

짐작보다 ‘사회주의적’이었던 인도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정부의 경제 ‘개혁’ 조처였고, 그 첫 번째는 소매 유통 시장에 대한 외국 자본의 직접투자 허용이었다. 정부는 1년 전부터 외국 유통 자본이 51%까지 지분을 갖는 대형 유통점의 설립 허가 법안을 제출해놓았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월마트 등의 진출로 영세 상인들의 생존권이 짓밟히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한 현실이다. 상인들은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법안을 밀어붙였고, 결국 올해 9월 입법 처리했다.
개혁의 또 다른 주요 내용은 유류 가격 인상이었다. 정부는 경유 가격을 ℓ당 5루피씩, 총 14% 인상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각 가정이 취사용 액화석유가스(LPG)를 구입할 때 지급하던 정부 보조금을 1년에 6통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가뜩이나 높은 인플레이션(최근에 좀 떨어진 것이 7% 수준)으로 고통받는 인도인들에게 이것은 정말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리는 격이었다.
더구나 인도 민중은 더 이상 참고 있지 못할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이번 개혁은 결코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지난 20여 년간 지속돼온 이른바 ‘빅뱅’ 개혁의 한 부분이었다. 마침 현 총리인 만모한 싱은 20년 전에 재무장관으로서 빅뱅 개혁을 처음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본래 독립 이후 인도 경제에는 늘 ‘사회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물론 엄청난 빈부 격차에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카스트 차별까지 존재하는 나라에 ‘사회주의’라는 규정은 가당치 않다. 그러나 인도 경제가 상당한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포함한 강력한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철강·광산·금속·통신·보험·전력 등 주요 산업이 국유화됐고, 소련식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자유화 이후 10% 줄어든 하위 60% 소득
여기에는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이념적 영향이 컸다. 그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고, 그 대안으로 영국식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우리나라 대우상용차를 인수한 인도 굴지의 재벌 타타 가문의 J. R. D. 타타가 국영기업도 수익 위주의 경영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네루가 했다는 답변은 유명하다. “이윤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말게. 그건 더러운 짓거리야.” 현재 인도 여당인 국민회의는 바로 이 네루의 정당으로서, 네루 사후에도 상당 기간 그의 경제 이념을 충실히 계승했다. 네루의 뒤를 이어 국민회의를 이끈 그의 딸 인디라 간디는 주요 은행들까지 국가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공산당조차 이런 국민회의를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하는 민족부르주아지 정당이라 평가하며 비판적 지지와 협력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전환의 계기는 1991년에 찾아왔다. 그해 인도는 심각한 외환 고갈 상태에 빠졌고,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IMF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강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에도 구제금융의 대가로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개혁을 요구했다. 이때 집권당은 다름 아닌 국민회의였다. IMF의 협박 앞에 국민회의는 이념적 전향을 감행했다. 무역과 투자를 개방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했으며, 국영기업 사유화에 착수하고 통화주의 정책을 수용했다. 이 모든 정책 전환의 사령탑 역할을 맡은 이가 당시 국민회의 내각의 재무장관인 싱 현 총리다.
이후 싱은 경제 전문가에서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2004년 총선에서 야당이던 국민회의는 다른 소규모 정당들과 통합진보연합(UPA)을 결성해서 극우파 여당 힌두인민당(BJP)에 맞섰다. 결과는 UPA의 승리였다. UPA는 BJP의 재집권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 본 좌파 정당들의 지지까지 받아 새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당 지도자인 소냐 간디(인디라 간디의 며느리)는 자신이 직접 총리를 맡지 않고 싱에게 그 자리를 넘겼다. 이것은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던 2000년대의 전 지구적 추세를 인도 역시 충실히 따르겠다는 선포였다.
싱이 이끄는 UPA 정부는 지속적인 자유화·사유화를 통한 성장 중심 정책을 이어나갔다.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싱 정부의 이런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2007년에는 인도 역사상 최고의 성장률인 9%를 달성하기도 했다. 영미권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성과가 싱 총리의 시장 친화 정책 덕분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인도의 성장 속도가 중국에 비해 느린 게 인도가 중국보다 아직 ‘덜’ 자유주의적이기 때문이라며 개방과 탈규제에 좀더 채찍질을 가하도록 주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행진은 여기까지였다. 금융위기 이후 인도의 성장률은 하강 곡선을 그렸다. 주요 성장 산업들이 내수보다는 수출에 의존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성장 수치에도 불구하고 인도 경제는 2000년대 호황기에 계속 속병을 키워가고 있었다. 현재 인도에서는 상위 20%가 국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하위 60%의 몫은 전체 소득의 27.9%에 불과하다. 자유화 이전에는 그래도 이들에게 총소득의 38.6%가 돌아갔다. 빈부 격차가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10%에 가까운 인플레이션이 덮쳐 실질소득이 더욱 떨어지고만 있다.

총선과 지방선거, 실망스런 결과
21세기 들어 세계경제 성장의 마지막(?) 견인차 역할을 해온 두 경제(중국과 인도)의 최근 침체는 곧 신자유주의가 직면한 막다른 골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싱 총리의 UPA 정부는 오로지 ‘더 많은 신자유주의’에서 출구를 찾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인도 엘리트들의 성공이 지금 이들의 맹목을 낳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이제는 노동자·소상인 등 민중이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첫 포문인 이번 총파업에는 좌파 정당들이 함께했다. 공산당(CPI), 마르크스주의공산당(CPI-M), ‘전인도 전진 블록’, 혁명사회당 등 좌파 정당들은 ‘좌파전선’이라는 연합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하는 정당은 CPI-M이다. 이들은 본래 CPI가 지나치게 친국민회의 노선을 걷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64년에 CPI에서 떨어져나온 세력이다. CPI-M은 이후 웨스트벵골과 케랄라, 두 주(‘주’라고는 하지만 이 둘의 인구를 합치면 1억 명이 훨씬 넘는다)에서 장기 집권하며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산당으로 성장했다.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뒤에도 웨스트벵골과 케랄라에서는 CPI-M이 계속 선거에서 승리해, 외국 논평가들로부터 ‘기이한’ 정치 현상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요컨대 인도는 좌파 세를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좌파전선은 UPA와 민족민주연합(NDA, BJP가 국민회의 주도의 UPA에 맞서 결성한 정당 연합)에 이은 당당한 원내 제3세력이다. 총파업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민중의 불만과 열망이 좌파 정치 세력들과 만나면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차라리 한 대륙)에서 1991년의 대전환을 뒤집는 또 다른 대전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상황이 간단하지만은 않다. 최근 몇 년간은 좌파전선에 오히려 혼란기였다. 신자유주의 공세가 위기 상황인데 그 대항자여야 할 좌파 역시 혼동 상태인 것이다. 그 대표적 지표가 2009년 총선과 2011년 지방선거 결과다. 좌파전선은 총선에서 상당한 약진을 기대했다. 집권 가능성까지 내다보았다. 하지만 21.15%의 득표로 총 543석 중 79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제3세력의 위상은 견지했지만, 집권과는 거리가 먼 성적이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좌파전선이 UPA와의 차별화를 분명히 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업보였다. CPI의 친국민회의 노선을 비판하며 출발한 CPI-M조차 2004년 이후 줄곧 싱 총리의 UPA 정부에 대해 비판적 지지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 싱 정부가 2008년 미국과 핵협정을 맺는 등 노골적인 친미 정책을 펼치자 그제야 정부 지지를 철회했다. 비록 전투적 야당으로 입장을 선회하기는 했지만 이제까지의 ‘친국민회의’ 이미지를 씻어버리기에 1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은 힌두근본주의자들(BJP)의 집권을 막으려고 국민회의에 표를 던지는 관성에서 벗어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2년 뒤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좀더 위기적인 양상이 나타났다. 좌파전선의 대표 정당 CPI-M이 웨스트벵골주에서 대패한 것이다. 케랄라주에서도 이들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특히 웨스트벵골에서 참패를 맛본 것은 CPI-M 주도의 좌파 주정부가 UPA 중앙정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들은 급기야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던 농민들과 폭력 충돌을 빚었다. 인도 좌파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지방권력 장악이 오히려 좌파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대중투쟁이 준 기회를 잡을까
CPI-M의 이 역사적인 패배 이후 인도 좌파 내에서는 혁신과 재구성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도 인도 공산주의 정당들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스탈린주의의 잔재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또한 ‘국민회의 2중대’ 이미지를 심어준 오래된 국민회의에 대한 비판적 지지 노선을 극복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고, 지방정부의 만년 여당으로 있으며 대중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일종의 집권당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모두가 수십 년 된 문제니 풀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처럼의 대중투쟁 국면은 분명 인도 좌파에 자기 혁신을 하는 절호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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