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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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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혁명의 기억 약진하는 좌파블록

1976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사회주의적 헌법 만들었던 포르투갈의 저력
경제위기에서 사회당 대체할 가장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는 ‘좌파블록’
등록 2013-07-24 12:10 수정 2020-05-03 04:27

지난 7월 초 열흘 가까이 포르투갈은 정 치 위기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주요 각료들 이 사퇴하면서 우파 연립정부가 무너질 조짐 을 보였다. 조기 총선이 실시되는 것 아니냐 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발 카바쿠 실 바 대통령이 진화에 나서서 일단 연정 붕괴 는 막았다.
‘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 국가 목표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긴축정책 때문이었 다. 포르투갈은 다른 남유럽 국가들과 마찬 가지로 지난 몇 년간 재정위기에 시달렸다. 그래서 2011년 유럽연합(EU) 등에서 구제금 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 채권단은 구 제금융 조건으로 긴축을 요구했다. 그러나 긴축정책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실업률은 18%로까지 치솟았다. 당 연히 경제정책 책임자들을 향해 대중의 불 만이 끓어올랐다. 이것이 연립정부 내에 긴 장과 갈등이 높아진 이유였다.
지금 포르투갈 사정이 이렇다. 그리스와 너무도 닮은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 나라의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그것은 포르투갈이 서유럽에서 가장 최근에 혁명을 경험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는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이 나라는 한국의 유신 정권과 비슷 한 권위주의 체제 아래 있었다. 그리고 이때 까지도 해외 식민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 두 상황이 얽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 프리카 식민지에서 민족해방투쟁이 벌어지 자 진압군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자 양심적 장교들이 이에 반발해 1974년 4월25일 쿠데 타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쿠데타였다. 하지 만 낡은 체제에 반발하던 대중이 이에 호응 하면서 혁명으로 발전했다. 이때 반란군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을 달고 거리에 나왔기 때문에 ‘카네이션 혁명’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제헌의회는 2년 뒤 인 1976년 새 헌법을 제정했다. 여기에는 당 시의 혁명적 분위기가 그대로 담겼다. ‘경제 적, 사회적, 문화적 민주주의’를 국가 목표로 제시했고, ‘참여민주주의의 심화’를 언급했 다. 노동자 권리 보장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헌법에 실렸고, 사용자는 파업에 맞서 직장 폐쇄를 할 수 없다는 조항도 있었다. 한마디 로 이제까지 자본주의 국가의 헌법 중 가장 ‘사회주의적’인 헌법이었다.
이게 포르투갈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물론 혁명의 열기는 곧 잦아들었다. 새 헌법 제정 이후 잇단 선거에서 좌파 제1정당으로 떠오 른 사회당(PS)은 1976년 헌법의 이상을 실현 하기보다는 서유럽 자본주의에 통합되는 길 을 택했다. 지금 그 길의 끝에서 포르투갈은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와 마 주하고 있다. 하지만 30여 년 전 혁명의 여진 을 결코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우파 정당인 현 집권당의 명칭이 ‘사회민주당’(PSD)이라는 당황스러운 사실도 어쩌면 그 증거 중 하나 다. 우파 정당조차 이 정도 이름이 아니면 표 를 받을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포르투갈이다.
그리스 공산당과 흡사한 포르투갈 공산당
오랫동안 이런 분위기의 최대 수혜자는 사회당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일어날 때도 집권당은 사회당이었다. 하지만 조제 소크라테스 총리의 사회당 정부가 위기 대 책으로 긴축정책을 내놓으면서 인기가 급 락했다. 역시 긴축으로 위기에 대응하다 몰 락하고 만 그리스의 중도좌파 정당 범그리 스사회주의운동(PASOK)과 같은 운명이었 다. 결국 2011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우파인 사회민주당에 정권을 내줬다. 사회당이 얻 은 28.1%는 2년 전 총선 득표율 36.6%에서 8.5%나 빠져나간 수치였다.
현재 포르투갈에서는 좌파의 두 세력이 이런 사회당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 첫번째는 통합민주연합(CDU)이다. 이 조직은 상설 정당 연합이다. 공산당(PCP)과 생태주의녹색당(PEV·이하 녹색당)이 주축이고, ‘민주개입’이라는 소규모 좌파 조직도 함께하고 있다. 공산당은 1974∼76년 혁명기에 좌파의 주도권을 놓고 사회당과 경쟁하던 유서 깊은 조직이다. 2010년 작고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가 이 당의 고참 당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공산당이 1987년부터 모든 선거에 신생 녹색당과 선거 연합을 결성해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통합민주연합의 출발이다.
공산당과 녹색당은 분명 별개의 당이다. 당 조직이 따로 있고 일상 활동도 별개다. 선거에 공동의 후보명부를 제출하지만(포르투갈의 선거제도는 완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다), 의원단은 별도로 구성한다. 심지어 중요한 쟁점에 대한 입장도 제각각이다. 가령 녹색당은 핵 발전에 반대하는데 공산당은 찬성한다. 그런데도 어쨌든 선거 때는 마치 하나의 당처럼 힘을 모은다. 지역 조직이 더 촘촘한 공산당이 녹색당 당원들에게 지역 당사를 선거운동 사무실로 개방하기도 한다. 공동의 청년 조직 ‘청년 통합민주연합’을 운영하기도 한다.
총선 때마다 통합민주연합은 줄곧 7∼8%를 득표했다. 거의 변함이 없다. 이것은 강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통합민주연합, 그중에서도 공산당에는 탄탄한 고정 지지층이 존재한다. 특히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렇다. 그러나 수십 년째 지지율이 늘 그 수준에 고정돼 있다는 것은 분명 한계다. 이것은 통합민주연합이 사회당의 견제 세력으로 존속할 수는 있어도 이를 대체할 주자로 부상하기는 쉽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포르투갈 공산당은 그리스 공산당(KKE)과 무척 닮았다. 두 당 모두 낡은 스탈린주의 전통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 이런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도전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좌파블록(BE)이다. 좌파블록은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이 막 창당을 준비하던 1999년에 출범했다. 마오주의 정파인 민중민주연합(UDP), 트로츠키주의 세력인 혁명적사회주의당(PSR) 그리고 공산당에서 출당당한 이들의 조직인 ‘정치21’, 이 세 조직이 창당의 산파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에서는 혁명 시기부터 이 급진 좌파 세력들이 만만치 않은 세를 보였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한데 이들이 좌파블록으로 뭉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통합의 계기는 좌파의 뼈아픈 패배에서 비롯됐다. 1998년 포르투갈에서는 낙태의 비범죄화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좌파는 비범죄화에 찬성했고 우파는 반대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 진영의 승리였다. 유권자의 31.9%가 국민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이 48.28%, ‘반대’가 50.07%였다. 사회당, 공산당, 급진좌파, 여성주의자들이 광범하게 결집했음에도 결과가 이랬다. 범좌파 내에서도 특히 급진좌파들이 이 패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사회당(그리고 공산당)을 대체할 좌파의 새 주도 세력이 등장해야만 이런 좌파의 무기력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새 구심을 만들기 위해 통합을 단행했다.
창당 주도한 세 조직, 정파로 남아
통합민주연합과 달리 좌파블록은 처음부터 단일 정당으로 출발했다. 정당 연합 형태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치열한 토론과 표결 끝에 하나의 정당으로 합치는 쪽을 택했다. 다만 창당을 주도한 세 조직은 당내 정파로 계속 남아 활동하기로 했고,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대의기구의 50%는 당원이 선출하는 한편 나머지 50%는 세 정파에 할당하는 독특한 대의제도를 취하게 되었다. 세 정파는 정파 할당 부분 내에서 3분의 1씩 동일한 의석을 배정받는다.
좌파블록은 창당 첫해에 치른 총선에서 2.4%를 득표해 2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사회당이 딱 절반의 의석을 차지하는 바람에 이 두 의석만으로도 캐스팅보트의 힘을 발휘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등원 1년 만에 여성에 대한 폭행을 형사처벌하는 법안을 제출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것이 좌파블록의 첫 번째 입법 성과였다. 하지만 한동안은 득표율이 2% 수준에 머물며 좌파 내 소수 세력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공산당과 달리 조직 노동에 뿌리박지 못한 것이 큰 한계였다. 창당 초기 좌파블록은 ‘지식인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확산에 반대하는 투쟁에 앞장서면서 점차 상황이 바뀌었다. 좌파블록의 첫 번째 의원 중 한 명이자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기도 한 프란시스코 로사의 인기도 한몫했다. 이에 힘입어 2005년 총선에서 좌파블록의 득표율은 드디어 5%선을 넘어섰다(6.4%). 이 무렵 좌파블록은 사회당을 대체할 대안으로 부상하는 것을 당의 전략 목표로 정했다. 사회당의 왼쪽 공간을 놓고 공산당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경제위기 이후 실시된 첫 선거인 2009년 총선에서 드디어 역사적 기회가 왔다. 이 선거에서 좌파블록은 9.81%를 득표해 의석을 8석에서 16석으로 2배 늘렸다. 지지율이 처음으로 통합민주연합(7.86%)을 앞지른 것이다. 좌파블록으로 이동한 유권자들은 대개 과거 사회당 지지자였다. 좌파의 대표자 위상을 놓고 사회당과 경쟁하겠다는 전략이 실제 먹혀든 것이었다. 특히 경제학자 출신인 로사가 대변한 경제 대안이 주효했다. 그것은 첫째 모든 국가 채무의 공개 감사, 둘째 외채 재협상, 셋째 부자 증세와 금융 과세를 통한 은행 부실 해결이었다. 지난해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연합(SYRIZA)이 내건 대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좌파 정부’ 건설 대안 제시
2011년 총선에서 좌파블록의 전진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득표율이 5.2%로 떨어졌고 의석수는 다시 8석으로 줄어들었다. 공산당과 달리 좌파블록은 지지층의 응집력이 약해 정세에 따라 쉽게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좌파 위기의 진원지인 사회당을 대체할 가장 유력한 후보가 좌파블록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좌파블록은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처럼 ‘좌파 정부’ 건설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와 긴축정책에 맞서는 모든 좌파 세력의 결집에 좌파블록이 앞장서겠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회당이 점한 공간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오히려 이제 시작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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